국정원 사람들의 비극

[유창선 칼럼] '제2의 이수일'을 막기 위한 길

등록 2005.11.23 09:32수정 2005.11.23 10:13
0
원고료로 응원
`국정원 도청' 사건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아오던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운데 21일 새벽 이 전 차장의 시신이 안치된 광주  한국병원을 찾은 유가족과 지인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다.
`국정원 도청' 사건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아오던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운데 21일 새벽 이 전 차장의 시신이 안치된 광주 한국병원을 찾은 유가족과 지인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다.연합뉴스=형민우

이수일 전 차장의 자살은, 검찰조사에서 국정원의 도청을 시인한 데 대한 괴로움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자신의 진술이 조직과 상관을 배신한 것이라는 자책에 시달린 나머지 극단적인 행동을 택한 것 같다고 한다.

얼마전 검찰에서 김은성 전 차장을 만났던 이 전 차장은 "법원으로 넘어가면 국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해야 하는데, 배신자가 되니 어쩌면 좋겠느냐"며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을 계속한 것으로 보도됐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한 행위가 한 인간에게 그토록 괴로움을 안겨준 현실, 그 앞에서 우리는 국정원 도청문제를 둘러싼 비극적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진실'과 '의리' 사이

고인이 된 이수일 전 차장 뿐만이 아니다.

구치소에 있는 김은성 전 차장은 자살소식을 접한 이후 면회와 식사를 거절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모두 도청사실을 시인했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음을 택했으니, 다른 한 사람의 마음상태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임동원 전 원장은 자살소식을 듣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고, 이 전 차장의 직속상관이었던 신건 전 원장은 충격 속에 말을 잇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소식을 접한 국정원 직원들도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특히 검찰조사에서 도청사실을 진술한 직원들의 경우는, 두 전직 원장의 구속과 전직 상관의 자살 앞에서 역시 괴로운 심경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역시 자신들의 진술로 이같은 사태가 초래된 것 같은 자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불법행위, 그리고 상관들의 혐의를 검찰에서 낱낱이 밝혀야 했던 상황은 당사자들에게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두 전직 차장이나 국정원 직원들이 보여온 괴로운 모습들은 그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면 이같은 비극적 상황을 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검찰수사일까. 무덤까지 비밀을 갖고가야 할 사람들을 상대로 도청사실을 조사한 검찰수사가 비극을 가져온 것인가.

이번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검찰수사에 대한 울분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국정원의 일을 이런 식으로 파헤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는 식의 항변은 이미 김대중 정부 관련 인사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한정된 즉자적 반응일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비극의 구조는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다. 도청사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상황, 그럼에도 그것을 덮고가려는 정치적 상황 사이의 충돌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국정원 사람들을 '진실'과 '의리' 사이에서 고통받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근원이다.

도청 시인한 사람들, '배신자' 족쇄에서 풀어줘야

21일 오후 호남대학교 관계자 등이 호남대학교 광산캠퍼스 복지관 3층에서 이 전 차장의 빈소를 준비하고 있다.
21일 오후 호남대학교 관계자 등이 호남대학교 광산캠퍼스 복지관 3층에서 이 전 차장의 빈소를 준비하고 있다.광주드림 임문철
이미 국정원의 도청사실은 백일 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도청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책임자들의 모습은 그들의 부하들에게 오늘과 같은 괴로움을 안겨주고 있다.

무의미한 일이다. 국정원이 도청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뒤짚기 어려운 상황이 된 마당에, 결국 부하들만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밖에는 되지않는다. 도청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시인한 사람들이 배신자라는 자책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앞으로도 검찰수사는 더 남아있다. 수사가 끝나도 법정에서 함께 재판을 받게될 지도 모른다. 그 때, 이 전 차장이 걱정했던 대로 전직 원장들의 면전에서 그들의 도청관련행위를 진술하는 '배신'을 해야하는 상황이 있을 지도 모른다.

도청사실을 아직도 부인하고 있는 전직 원장들의 모습이, 자신의 안전만을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국정원의 과거 최고책임자로서 거기에서 있었던 일들은 무덤까지 갖고가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에 앞서 풀어야할 더 긴박한 과제가 생겨났다. 도청사실을 시인한 국정원의 사람들을 '배신자'라는 자책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일이 그것이다.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 고통이 되는 족쇄를 그들에게서 풀어주어야 한다. 이는 단지 국정원의 사람들을 괴로움에서 구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가치혼란을 막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털고 가자. 국정원 도청의 모든 것을 국민과 역사 앞에 밝히고 가자. 그것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고, '제2의 이수일'을 만들지 않는 길이다. 부하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을 두 전직 원장이 다시 생각해야 할 때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2. 2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3. 3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4. 4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5. 5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