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도청' 사건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아오던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운데 21일 새벽 이 전 차장의 시신이 안치된 광주 한국병원을 찾은 유가족과 지인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다.연합뉴스=형민우
이수일 전 차장의 자살은, 검찰조사에서 국정원의 도청을 시인한 데 대한 괴로움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자신의 진술이 조직과 상관을 배신한 것이라는 자책에 시달린 나머지 극단적인 행동을 택한 것 같다고 한다.
얼마전 검찰에서 김은성 전 차장을 만났던 이 전 차장은 "법원으로 넘어가면 국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해야 하는데, 배신자가 되니 어쩌면 좋겠느냐"며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을 계속한 것으로 보도됐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한 행위가 한 인간에게 그토록 괴로움을 안겨준 현실, 그 앞에서 우리는 국정원 도청문제를 둘러싼 비극적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진실'과 '의리' 사이
고인이 된 이수일 전 차장 뿐만이 아니다.
구치소에 있는 김은성 전 차장은 자살소식을 접한 이후 면회와 식사를 거절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모두 도청사실을 시인했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음을 택했으니, 다른 한 사람의 마음상태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임동원 전 원장은 자살소식을 듣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고, 이 전 차장의 직속상관이었던 신건 전 원장은 충격 속에 말을 잇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소식을 접한 국정원 직원들도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특히 검찰조사에서 도청사실을 진술한 직원들의 경우는, 두 전직 원장의 구속과 전직 상관의 자살 앞에서 역시 괴로운 심경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역시 자신들의 진술로 이같은 사태가 초래된 것 같은 자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불법행위, 그리고 상관들의 혐의를 검찰에서 낱낱이 밝혀야 했던 상황은 당사자들에게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두 전직 차장이나 국정원 직원들이 보여온 괴로운 모습들은 그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면 이같은 비극적 상황을 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검찰수사일까. 무덤까지 비밀을 갖고가야 할 사람들을 상대로 도청사실을 조사한 검찰수사가 비극을 가져온 것인가.
이번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검찰수사에 대한 울분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국정원의 일을 이런 식으로 파헤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는 식의 항변은 이미 김대중 정부 관련 인사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한정된 즉자적 반응일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비극의 구조는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다. 도청사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상황, 그럼에도 그것을 덮고가려는 정치적 상황 사이의 충돌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국정원 사람들을 '진실'과 '의리' 사이에서 고통받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근원이다.
도청 시인한 사람들, '배신자' 족쇄에서 풀어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