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놨다가 통일 안되면 책임지시라요!"

[평양 마라톤대회 참가기] 북측선수와 손잡고 끝까지 완주하다

등록 2005.11.28 17:24수정 2006.10.0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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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마이뉴스 주최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남북의 선수들이 출발전 몸을 풀고 있다.

오마이뉴스 주최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남북의 선수들이 출발전 몸을 풀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탕' 출발신호와 함께 여자 선수들이 먼저 달려 나갔다.

"남자 참가자들 준비해주세요."

탁 탁 탁… 발을 높이 들어 뛰면서 아스팔트 바닥을 몇 차례 굴러 보았다. 주최 측이 준비해 준 운동화는 걱정과는 달리 가볍고 발에 알맞게 맞아 신발 때문에 완주를 못했다는 핑계는 댈 수 없게 되었다.

평양시민 박수소리에 '불끈'...끝까지 달려봐?

사실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고 온 터라 완주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막상 신발을 신고 준비운동을 하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풀코스 신청을 해놓고 무리한 연습으로 무릎을 다친 후로 아침 달리기를 그만둔 지 2년이 다 되어 간다. 아무래도 완주는 자신이 없었고 설사 무리해서 완주를 한다 해도 후에 상처가 덧나서 거의 다 나은 무릎이 재발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 10km를 전후해서 무릎에서 신호가 올 것이고 걸어서라도 할 수 있으면 하고 아니면 낙오자들을 위한 버스에 타면 그만이었다.

신호와 함께 모두들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 나갔다.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는가. 금강산 관광을 시작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났고 개성공단이 가동되면서 방북자들의 희소성은 줄어들었지만 평양 한복판을 두 다리로 달리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더욱이 옆에서 북측선수들이 나를 보고 웃으며 같이 뛰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끝까지 갑시다!"


옆에서 나란히 뛰던 북측선수가 한쪽 팔을 세우고 웃으며 소위 우리 식의 '아자'를 해 보인다. '끝까지 가다니?' 아마 완주를 말하는 것 같았다. '예 그럼요' 하고 대답을 보내면서 완주에 대한 욕심이 조금 더 커진다. 제한시간만 아니라면 걸어서라도 들어오겠는데….

마라톤 복장에 아무 국가 표식이나 글자 표식이 없지만 뒤에서 보아도 확연히 구분이 되는 것은, 남측 선수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문 마라톤 타이즈나 팬티 등 요란한(?) 복장을 한 것에 비해서 북측선수들은 그야말로 아침에 가벼운 조깅을 하는 편한 운동복 차림이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달리고 있던 남측 참가자들이 지나가던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자 주민들도 격려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면 '반갑습네다, 힘내시라요' 하는 소리들이 박수와 함께 어우러져 넓은 길 위에 쏟아져 들어왔다.

어차피 힘이 없어서 완주를 못하는 것은 아닐 터, 나도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며 뛰었다. 인도에서 한 걸음 내려서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는 할아버지의 깊은 주름과 듬성듬성 빠진 이까지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신기했다. '반갑습니다, 그럼요 반갑구 말구요' 마치 구름 위를 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a '평양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남북의 선수들이 평양시내를 달리며 손을 흔들고 있다.

'평양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남북의 선수들이 평양시내를 달리며 손을 흔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20여 분 뛰었을까. 오르막을 오르니 눈앞에 넓은 대로가 펼쳐졌다. 왕복 10차선도 넘어 보이는 길이 지평선 끝에 한 점으로 뻗어있었다. 마라톤 코스 중에 이렇듯 쭉 뻗은 길이 힘들다더니 저 점까지라도 갈 수 있을까, 갑자기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차도 중앙선으로 뛰기 때문에 듬성듬성 길 옆에서 박수를 보내주는 주민들의 얼굴도 아까만큼은 잘 보이지 않았다. 멀리 물을 준비해 둔 것이 보였고 그 옆에 거리를 표시해 둔 것도 보였다. 가까이 달려가 보니 세상에! 이제 5km라니!

길 옆에 늘어선 주민들과 인사하고 소리를 지르느라 힘을 소비한 탓일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지금부터라도 속도 조절과 함께 호흡 조절을 하지 않으면 완주는커녕 반환점까지도 못 갈 것이고 그러면 걸어서도 시간 내에 못 들어 올 것이다.

남남북녀 두 손바닥의 역사적(?) 만남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뒤부터 멀리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럿이 혹은 홀로 뛰고 있었다. 나는 왜 혼자 뛰게 되었을까? 호흡 조절이 될 때까지 달리기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시선을 내리고 뛰는 데만 집중하려 해도 고개는 자꾸 옆으로 향하고 손이 자꾸 올라갔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그까짓 꺼 완주 좀 못하면 어떠랴! 내가 무슨 선수도 아닌데… 손을 흔들 때마다 돌아오는 박수소리에 고무되어 한번 올라간 손은 쉽게 내려오지 못했다.

5km까지의 고통과는 사뭇 다르게 반환점은 생각보다는 덜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먼저 달려 나간 여자 선수들과 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만나기 시작하자 갑자기 힘이 솟았다. 머지않아 반환점이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중앙선 너머로 팔을 뻗쳤다. 마주 달려오던 북측 여자선수 하나가 멀리서 나와 같은 자세로 팔을 내밀고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녀가 장갑을 벗었는지, 아니면 원래 맨손이었는지… 땀에 밴 손 두 개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쳤다. 수줍어하는 어린 미소였지만 반가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은 꾸밀 수 없는 그대로 내게 넘어왔다. 짝 하고 손이 마주쳤던 소리는 몇 km를 달리도록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반환점 바로 직전 10km 표지판에서 물컵을 들었다. 마시면서 속도를 줄이고 있는 내게 '그냥 탁 하시라요' 한다. 편하게 마시고 아무데나 던져 버리라는 말인 것 같았다. 주저 않고 탁 해버렸다.

무릎에서 소식이 오기 시작했다. 오래되어 잊기는 했으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이 따끔한 것으로 무릎의 통증은 시작된다. 그래도 목표인 반환점은 돌았으니 이런 속도라면 이제 걸어도 시간 내에는 들어갈 수 있으리라. 아무 때나 달리기를 멈추어도 된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달리기를 덜 힘들게 했을까. 호흡도 편해지고 힘도 견딜 만 했다. 나는 아무려나 그냥 달리기를 계속했다.

주저앉은 북측 선수를 일으켜 세우다

반환점 근처부터 바로 앞에서 달리던 북측 남자 선수 하나가 12km 지점부터 속도를 줄이더니 내가 스쳐지나갈 즈음에 급기야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지나치다가 돌아가서 앉아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자신도 언제 멈출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도 예상 못한 행동이었으나 아무 생각이 없었다.

a 평양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남북의 선수들이 결승지점인 평양 서산축구경기장을 5km 앞두고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앞을 달리고 있다.

평양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남북의 선수들이 결승지점인 평양 서산축구경기장을 5km 앞두고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앞을 달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끝까지 갑시다!"

아까 북측 선수 중 누가 내게 해준 말이었다. 혹시 그가 아니었을까? 그는 앉은 채로 고개를 저으며 먼저 가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그냥 손을 내민 채 서서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다시 한 번 나를 올려다 본 그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가 잡힌 손에 힘을 넣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몇 km를 그냥 달렸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이든 하리라 생각을 했으나 내가 옆을 볼 때마다 쑥스러운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무슨 말이 필요 있으랴. 마주 잡은 손에 땀이 고여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앞과 뒤쪽으로 간격이 벌어져서 손을 잡고 달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본 연도의 주민들 중 누군가 먼저 '통일'이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우리도 달리면서 '통일'을 외쳤다. 우리가 '조국' 하면 주민들이 '통일'이라고 화답했다.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연스러운 합창이 되었다. 콕콕 쑤시던 다리는 전혀 아무 통증이 없었고 몸은 이상한 충만함으로 가득 차서 계속 손을 흔들며 달려도 힘이 들지 않았다.

"우리가 손을 놓으면 통일이 안 됩니다. 통일을 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 텐데 이까짓 거 못 견뎌서 어떻게 통일을 한다고 하겠습니까? 힘들어도 참읍시다." 누가 나보고 통일을 하라고 했던가? 이까짓 마라톤 대회가 통일을 하는데 무슨 힘이나 되겠는가? 갑자기 그와 나, 둘 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얼굴은 조금 고통스러워 보였으나 잡은 손은 놓으려 하지 않았다. 연도의 주민들은 통일을 외치고 우리는 힘든 상황에서도 잡고 있는 두 손을 들어 답을 해주었다. 열렬한 박수가 있는 구간은 덜 힘들고 그렇지 않은 구간은 급속히 힘이 드는 상황이 몇 차례 반복이 되고 있었다.

이 손을 놓았다가 통일이 늦어지면?

a 유원진씨(왼쪽)와 북측 선수가 함께 결승지점인 서산축구경기장에 힘겹게 들어서고 있다.

유원진씨(왼쪽)와 북측 선수가 함께 결승지점인 서산축구경기장에 힘겹게 들어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가 속도를 줄이더니 더는 못 뛰겠다는 표정으로 먼저 가라고 한다. 나는 끝까지 갑시다만 반복했지만 그의 얼굴에 진하게 퍼져 있는 고통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을 놓고 달리면 수월 할 텐데' 하며 그가 나를 본다. 손잡고 달리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손을 놓을 뻔하다가 나는 갑자기 '나비효과'를 떠올렸다. 어쩌면 어쩌면 이 손을 놓으면 통일이 정말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내가 '제발' 하는 눈으로 그에게 애원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가 다시 힘을 냈다. 옆에서 손뼉을 치며 응원을 해주던 식수대에서 '저기만 내려가면 5km 남습니다' 하며 힘내라고 손뼉을 쳐 준다. 저기가 어딘가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무릎은 아프지 않았다. 숨도 차지 않았지만 몸이 천 근이 되어 한발 한발 움직이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5km 남았다는 표지를 지난 지가 한참이 된 것 같은데 지평선 끝까지도 뛰는 사람들이 점으로 찍혀져 있었다. 더는 못 뛴다. 그 역시 몇 번을 고통스러워했으므로 둘이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나 하자.

"도저히 못 뛰겠습니다. 걸어갑시다." 나는 속도를 늦추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조 만큼만 가면 됩니다. 힘 내시라요." 이젠 오히려 그가 내 팔을 끌며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수줍어하는 눈빛은 여기 사람들의 특징인가. 아니면 잃어버린 우리의 옛 모습인가. 주저앉고 싶은 고통 속에서도 엉뚱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어느새 그가 내가 되어 있었고 주저앉으려는 그를 일으켜 세웠던 내가 그가 되어 있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가며 생각도 하얗게 비어갔다. 그가 말한 조금은 끝이 없었고 2.5km를 남기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냥 돌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간간이 그가 다 왔다고 정말 다 왔다고 하는 소리만 멀리서 들려왔다.

끝까지 갑시다, 이제 다 왔습니다!

a 필자(오른쪽)가 코스 내내 함께 달린 북측 선수와 함께 들어온뒤 어깨동무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필자(오른쪽)가 코스 내내 함께 달린 북측 선수와 함께 들어온뒤 어깨동무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파란 풍선으로 만들어 놓은 결승점이 보였다. 잡은 손에 땀이 흘러 자꾸 미끄러졌다. 아무리 다리를 움직여도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잡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를 부둥켜안았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지요, 뭐. 동무 아니었으면 나도 못 왔습니다. 발에 쥐가 나서 못 뛰었드랬는데…."

그는 여전히 쑥쓰러운 얼굴을 하고 나를 보다가 덤덤히 북측 선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고 나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처음으로 참가한 하프 마라톤대회에서 한 시간 사십 몇 분에 완주를 한 것이다.

기록 같은 거는 아무래도 좋았다.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내밀은 내 손을 마주 쳐주던 어린 여학생의 손과, 8km 가까이 손을 잡고 뛰었던, 버스사업소에서 일한다던 그의 손이 겹쳐져 내 손에 남아있었다. 끝까지 갑시다. 조금 더, 이제 다 왔습니다. 하는 목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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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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