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양복주머니에 살며시 넣어두고 싶었던 편지

생일 전날, 조촐하지만 따뜻하게 남편의 생일 잔치를 벌였습니다

등록 2005.11.29 18:27수정 2005.11.3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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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생일잔치 준비를 합니다. 색색의 풍선에 아이가 더 신납니다

생일잔치 준비를 합니다. 색색의 풍선에 아이가 더 신납니다 ⓒ 양지혜

오늘은 마흔 여덟 번째의 남편 생일입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이른 출근길에 나선 남편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를 아직까지 전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여러가지를 준비했고, 예쁜 생일파티로 조금은 기운 빠진 남편을 위로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날씨부터 시작해서 잘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간편하게 흔히들 하는 핸드폰의 문자메시지로 전하고 싶지는 않고, 그 가벼움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언제나처럼 편지를 쓰는 게 당연하지만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웬지 서먹하기에 축하의 마음을 가득 담아 이렇게 기사로 전하기로 했습니다.

a 깜짝선물로 마련한 스티커 사진들 입니다. 아빠 핸드폰부터 시작해 온통 붙여 놓을겁니다.

깜짝선물로 마련한 스티커 사진들 입니다. 아빠 핸드폰부터 시작해 온통 붙여 놓을겁니다. ⓒ 양지혜

나이가 들어 생일을 맞는다는 것은 젊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나이 한 살을 더 보탠다는 것도 그렇고, 일 년 동안 살아 온 삶의 자취와 현재의 상황이 다가 올 미래에 대해 즐겁고 행복하기보다는 무거움이 더 크게 자리를 합니다.

특히 우리 가족에게 올해는 유난스럽게 다난했고, 남편에게는 남은 일생을 걸고 현실정치로의 재진입을 시도하는 모험을 감행했던 한 해였습니다. 그로 인한 실패의 아픈 여운은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남편은 자신의 생일 날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a 작은 케잌에 비해 양초의 숫자가 너무 많았지만 촛불은 더 환했습니다

작은 케잌에 비해 양초의 숫자가 너무 많았지만 촛불은 더 환했습니다 ⓒ 양지혜

그래서인지 남편은 며칠 전부터 제게 당부를 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가까운 후배들과 축하 술잔이라도 기울이련만, 오늘은 중요한 선약이 오래 전부터 있다는 것과 불편한 마음이니 조용히 우리끼리 지내자고 했고. 그 고단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기에 하루 전인 어제 생일잔치를 했습니다.

a 아이의 예쁜 축하송은 아빠의 큰 힘이 되고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이의 예쁜 축하송은 아빠의 큰 힘이 되고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 양지혜

그래도 가족끼리는 조금 특별한 저녁 상차림과 멋진 생일선물인 가족사진 촬영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 또한 어제의 돌발적인 날씨와 며칠 전부터 부르튼 남편의 입술로 수포로 돌아가고 아이와 둘이 준비한 깜짝 생일선물과 작고작은 케이크 하나와 미역국으로 조촐한 생일 잔치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a 아빠 어깨에 걸린 무거움을 알고 있는지 연신 재롱으로 화답을 합니다

아빠 어깨에 걸린 무거움을 알고 있는지 연신 재롱으로 화답을 합니다 ⓒ 양지혜

하지만, 한 가지 가장 아쉬운 일은 제가 남편에게 늘 하던 생일선물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년에 한 번 남편의 생일 아침에 양복주머니에 살짝 넣어주는 편지를 쓰지 못했습니다.

제 믿음이, 우리 가족의 따뜻한 사랑이 남편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내년 남편 생일날은 모두가 함께 진심으로 축하하며 오늘의 조금은 쓸쓸하고 아쉬움이 있었던 마흔 여덟 번째 생일을 웃으며 말하게 되길. 양복 주머니 속에 넣어 둘 생일편지를 이제서야 띄웁니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 합니다

불혹(不惑)

- 이산하

백조는
일생에 두 번 다리를 꺾는다
부화할 때와 죽을 때,
비로소 무릎을 꿇는다

나는
너무 자주 무릎 꿇지는 않았는가


당신의 마흔 여덟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이제까지 22년을 함께 살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당신은 세상을 향해 한번도 무릎을 꿇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을 말했고, 남들은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일도 절대로 '실패'를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당당함이 때로는 타인들에게 오만으로 몰리고, 시기의 눈빛과 오해로 인한 관계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언제나 여유만만과 침착함을 잃지 않고 이겨내고 지켜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모습에 존경과 자랑스움을 배우고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당신곁에 있는 많은 선후배들은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신뢰하며 당신이 가는 걸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아들과 저도 그렇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 모두는 당신에게 작은 소망을 전합니다.

이번 실패했던 당신의 선택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마음의 짐을 벗어 버리고, 열심히 살아왔던 당신이, 진정 당신만의 몫으로 펼쳐 보고자 했던 한 번의 축제로 정리 하기를 기대 합니다. 당신이 끝없이 연연해 하거나 미련한 아쉬움으로 덧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이제 하나의 추억으로만 남겨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가볍게 다시 새로운 일을 향한 출발선에 서 있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보듬고 가야 할 후배들의 앞날과, 아직 어리지만 우리의 희망둥이인 울 아들의 미래, 부족하고 비실거리는 모자람 투성이인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언제나 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여전히 씩씩하고 담대한 당신답게
쫘~~~악 어깨 펴고
뚜벅뚜벅 큰 걸음 옮겨 놓기를 !

당신이 꿈꾸는 일이 하루빨리 이뤄지기를 꿀단지와 함께 열심히 기도 하겠습니다.

마흔 여덟 번째 생일 아침에 마눌 드림 /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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