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각기 비명을 지르는 군중 사이에서 어깨를 쥐며 도성 방향으로 뛰던 흉터 난 사내가 뇌까렸다. 예정했던 시각보다 한 박자 늦기는 했으나 그래도 좋은 때 터져 주었다. 이 정도 신용을 지키는 놈이니 이제 약조대로 가마에 올라 강원도로 뛰면 될 노릇이었다.
어깨를 데인 듯 고통스러운 가운데에도 성공했다는 뿌듯함과 다가올 보상에 대한 기대로 표정이 밝았다. 두어 차례 폭음이 더 있은 후 둔덕이 잠잠해지자 배에 타고 있던 경기수영 군졸들이 우르르 행궁 쪽으로 몰려왔다. 내달리는 군중들을 제지해 보고자 하였으나 성난 파도 앞에 놓인 모래성만큼도 제지력이 없었다. 결국 군중들을 막아 보려는 노력을 접고 행궁 쪽으로 올랐다. 그러자 무예별감과 훈련도감군이 칼을 빼어들고 그들을 막아섰다.
“냉큼 물렀거라”
선전관이 마치 이 소란의 주범에게라도 그러하듯 호통을 내렸다. 병조판서는 이 난장판에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흰 다만 주상전하의 안위가 염려스럽기로.....”
3백여 장졸을 통솔하고 죽도록 달려 행궁에 이른 영장이 잔뜩 칭찬을 기대했다가 머쓱해졌다.
“당장 군사를 물리고 복귀하지 않는다면 대역의 죄로 다스리리라!”
포도대장 이종승까지 나서 험악하게 꾸짖었다. 자객 한 둘의 소행이 아니라 총포와 폭약이 난무하고 군사들의 움직임까지 있으니 조직적인 반란이라는 의혹을 품은 고압적인 자세였다.
“말씀이 과하시오. 좌포장!”
이번엔 경기감사가 직접 나섰다. 자기 수하의 영장과 군졸들이 반란군 취급을 받는 모습이 못내 꼴사나웠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점점 묘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수하들이 대역의 모의를 꾀한 역도로 몰리고 있다면 결국 그 수장인 나 또한 한 통속으로 몬다는 것이오?”
경기병사가 내처 몰아쳤다.
“그런 뜻이 아니고, 이번 행행을 소임이 본관에게 있다 보니 아무래도 주의를 해야 하겠기기에......”
포도대장도 지지 않고 대꾸를 했다.
“아닌 말로 이번 일이 내부에서 벌어진 소행이면 그땐 어쩔 게요!”
경기병사가 말을 뱉으면서도 훈련대장 신관호의 눈치를 살폈다. 선전관이나 포도대장이나 다 의혹의 대상일 수 있으니 같은 처지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훈련대장이 자칫 이 말의 의미를 곡해할까 염려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쪽의 다툼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의 동태 때문인지 훈련도감군들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뭣이라!”
포도대장이 대노했다. 이쯤 되면 자존심 문제가 아닌 생사의 문제였다. 피차 비슷한 군사의 수에 서로 창과 칼을 빼어들고 있는 상태였다. 여느 때 같으면 무예가 출중한 무예별감들을 상대로 수영의 군졸 따위가 눈이나 마주치겠는가마는 정성이 무시당하고 역모의 무리로 취급되는 수모를 당한데다 자신들의 최고 수장까지 거들고 있으므로 여차하면 한 번 해 보겠다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지금이 어느 때인지 분별들을 못하는가!”
그때 너덜너덜해진 차양 옆에 꾸어다 놓은 보릿자락마냥 서있던 대신들 틈에서 노성이 뻗쳐나왔다. 영의정 김병학이었다. 퉁퉁한 몸에서 나온 괴성이 자못 위압적이었던지 금세 좌중이 조용해졌다. 모두 이제껏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 이상하리라 만치 무게 있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환궁을 하라 마라 결단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어린 왕과 살지 죽을지도 모른 채 어의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대원군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최고 권력자는 영의정이었다.
“저하께오선 아직 어리시고 섭정을 맡으신 대원군께오선 저토록 위중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득이 이 난국을 미욱한 이 몸이 떠안아야 할 듯 하오.”
천천히 걸어 나오며 내뱉는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경기병사는 속히 군사를 물리고 진영에 이르러 명을 기다리시오. 이 일이 국난으로 번지지 않도록 군의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오.”
“예,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자연스레 중재가 되어 기쁘다는 듯 경기병사가 흔쾌히 답했다.
“선전관은 속히 환궁 채비를 갖출 것이며.”
“예, 알겠사옵니다.”
선전관 역시 달게 답하고는 포도대장을 향해 말했다.
“저는 전하를 뫼시고 곧장 환궁하겠사오니 포장 영감께오선 이곳의 수습을.....”
“그보다는 영을 내려 도성 출입과 나루의 드나듦을 막고 사태를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같이 들어가심이 가할 듯하오. 이럴 때일수록 전하를 가까이서 보필함이 마땅한 신하의 도리가 아니겠소이까.”
위기의 순간에 주상 옆에 찰싹 달라붙어 이 기회에 확실히 눈도장을 박고 싶었던 선전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쥐새끼 같은 포도대장도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은 듯 했다.
‘여우 같은 놈’
그러나 이는 생각일 뿐이었다.
“그......그러면 그리하시지요.”
선전관이 내뱉었다.
“아니오. 좌포장은 이곳에 남아 훈련대장과 함께 현장을 수습토록 하오. 백성들을 소개하고 사건의 진상을 캐는 일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도성 내의 치안은 우포장으로 하여금 패초케 할 것인즉.”
가로막는 김병학의 말에 포도대장의 표정이 똥 씹은 얼굴로 변했다. 그러나 거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거역은 고사하고 행행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화나 미치지 않는다면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하오나 대궐까지 가는 길에 혹여 연이은 변이 따를까 저어하오니 훈련원 장졸들은 동행케 하심이......”
“아니오. 여기도 손이 많이 필요하니 행행에 따라나선 훈련원 군사들은 여기 남아 훈련대장을 거들도록 하시오. 도성 내의 방비와 전하의 수행은 총융청과 수어청 장졸들을 동원토록 하고 그래도 미비하다면 내 가솔들이라도 동원해 전하를 보위토록 할 터이니.”
선전관의 건의를 김병학이 간단히 묵살했다.
“출발토록 하라.”
선전관의 호령에 기마 무예별감들이 주상의 가마를 에워싸고 나머진 빠른 걸음으로 좇아 대열을 만들었다. 모두가 칼을 빼어든 모습이 기세등등했다. 가마에 올라 부지런히 그 뒤를 따르며 김병학이 슬쩍 미소를 흘렸다.
‘이대로라면 천하는 내 것이로다.’
행렬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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