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색은 여름의 추억이다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등록 2005.12.02 10:22수정 2005.12.0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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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11월 28일)에 암사동의 선사유적지를 찾았다. 정기적으로 쉬는 날이었다. 다음 날 오후에 다시 문을 나섰을 때는 가늘게 빗발이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챙겨들고 그곳을 돌아다니며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다.


처음 천호동으로 이사를 온 것이 80년이니까 아득한 옛 시절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처음 이사를 왔을 때나 지금이나 암사동의 선사유적지가 위치한 곳은 바로 옆의 현대적인 아파트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기가 서울인가 싶게 시골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어느 해 여름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그대로이다. 가끔 서울에 이런 곳이 남아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곳에서 가을의 색을 들여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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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초록도 분명한 색이지만 그러나 단풍의 계절이 오면 초록은 색이 아니다. 형형색색이라고 했을 때 가을이 펼치는 그 화려한 색의 대열에서 초록의 자리는 이제 없다. 하지만 가을이 와도 많은 수의 나무들이 초록을 고집한다. 버드나무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때문에 버드나무가 떨어뜨린 이파리의 길은 바래긴 했어도 여전히 초록의 길이다. 여름의 기억이 오랠수록 나무는 초록을 버리지 못한다. 버드나무의 여름 추억은 마지막까지 초록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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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그러니까 가을 낙엽에서 우리는 가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름의 추억을 함께 볼 수 있다. 가을은 형형색색이나 갈색으로 뒹굴며, 여름 추억은 초록빛 그대로 말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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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붉은 색의 가을에 깃든 것도 여름 추억일지 모른다. 여름에 우리는 싱그러운 초록빛이었지만 그때의 타는 열정은 분명 붉은 빛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붉은 빛의 가을 또한 우리의 여름 추억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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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젊은 날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자리에 있어도 반짝반짝 눈에 띄었다. 갈색으로 오그라든 낙엽들 속에서 노란색으로 선명하게 제 경계를 빛내는 단풍잎처럼. 그렇게 본다면 노란 단풍도 사실은 여름 추억의 힘으로 영근 빛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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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색은 단풍잎에만 깃들지 않는다. 열매에도 색이 있다. 열매는 가을에야 저토록 고운 빨강을 갖는다. 가을은 열매에게 저무는 계절이 아니라 절정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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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색은 원래 단풍의 것이 아니라 꽃의 것이다. 그러나 꽃은 치명적 약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계절의 변화를 달력의 숫자가 아니라 그저 날의 따뜻함으로 분별할 뿐이란 것이다.

겨울 초입의 날씨가 며칠간 푸근하다 싶으면 벌써 봄으로 착각하여 몽우리를 잡고 색을 내민다. 그러므로 꽃의 색을 유혹하고 싶다면 일단 먼저 꽃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면 아무리 추운 한겨울이라 해도 당신의 가슴 속에서 꽃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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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꽃은 색으로 피어나지만 단풍잎은 색으로 영근다. 그래서 꽃은 젊음의 색이고 단풍은 노년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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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그 색이 곱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처럼 빚어낸 빛깔이기 때문이다. 피어난 색깔은 주어진 색깔이지만 빚어낸 색은 내 생의 무게가 얹힌 삶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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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가을의 대화는 색의 대화이다. 그 색의 대화는 아울러 삶의 대화이다. 살아온 세월이 깊어지면 그래서 우리 또한 색의 대화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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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가을이 지나면 색마저 바랜다. 갈색은 색이 빠져나간 자리의 텅 빈 색깔이다. 나는 그 텅 빈 색깔의 가을을 한참 동안 부여잡고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나뭇가지도 내 맘 같았는지 바싹 마른 갈색의 나뭇잎을 부여잡고 바람이 이리저리 흔들며 손을 벌려도 여간해선 내놓지 않았다.

그때 발밑에선 밟힌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세상이 낙엽의 소리로 덮여있었고, 나뭇가지에 걸린 빛바랜 낙엽 하나는 색을 잃고 나면 소리로 세상을 덮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젊음이 가고 나면 색을 잃지만 세상에 들려줄 얘기 거리를 얻는다. 나도 가을이 되면 젊은 사람들이 나를 밟고 갈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낙엽의 소리로 입을 여는 가을이 되겠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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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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