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할머니 코끼리, 무리를 이끌다

어르신을 존중하는 동물 사회

등록 2005.12.07 20:11수정 2005.12.0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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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옛 것을 바로 배운 사람은 아주 잘 익은 포도를 먹고 잘 익은 포도주를 먹는 것과 같다. –탈무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평화로운 마을을 이끌고 있는 자는, 가장 많이 배운 김 선생님도 아니고, 가장 혈기왕성한 장년층 중의 누군가도 아니다. 다름 아닌 가장 나이 많은 호호할아버지 촌장님이다.

인민군 장교 리수화가 촌장에게 다가가, '거- 큰소리 한 마디 티디두 않고, 마을 사람들을 지도하는 뛰어난 영도력은 오데서 나오는 겁네까?'라고 묻자, 촌장님은,"머를 마이 메겨야지"라고 대답한다.

배불리, '마이 먹일 수 있는' 비결은 촌장님의 오랜 연륜 속에 묻어나는 경험과 지혜에 있지 않을까?

a 누워있는 할머니 침팬지

누워있는 할머니 침팬지 ⓒ 김소희


동물 세계에서도 어른이 대우받는다?

동물의 세계는 어떨까? 무조건 약육강식의 원리만이 지배하는 세계라 생각되는 터라, '동물 세상에는 늙은 동물이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이미 다잡아 먹혀서)'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동물 세계에서 연장자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프리카 잠비아의 카푸에 국립공원에서 야생 코끼리를 관찰하고 있던 학자들은, 12마리의 암컷과 4마리 새끼로 이루어진 무리를 진두지휘하는 우두머리 옆에 늘 1-2마리의 코끼리들이 유난히 가까이 붙어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우두머리는 60세 가량 된 할머니로 두 눈을 모두 실명한 상태였다. 가까이 붙어 있는 코끼리들은 눈 먼 할머니를 위해 돌덩어리, 경사, 가시덤불, 독사 등의 위험 장애물을 경고해 주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은 전체 무리의 전반적인 행군 방향을 할머니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학자들은 오랜 세월을 사는 동안 쌓인 할머니의 지혜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사자 무리 및 사냥꾼은 어떻게 피할지, 어디에 가야 맛있는 먹이와 물을 얻을 수 있고, 시원한 진흙 목욕을 하며 쉴 곳이 있는지 등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코끼리 무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적이 나타나도 사전에 눈치 챌 수 없다면? 죽을 지도 모르는 위험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다. 심한 가뭄 속에서 물을 찾을 수 없다면? 이 또한 모두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코끼리들은 전체 무리의 생사가 그 할머니가 오랫동안 체득한 경험과 지혜에 달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미 새끼도 낳을 수 없는 데다 약하고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그녀를 존중하며 가장 맛 좋은 나뭇잎 다발, 가장 깨끗한 물웅덩이, 가장 편한 쉼터로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코끼리 사회는 가장 나이 많은 암컷이 우두머리가 되어 무리를 이끄는 모계사회다).

사실, 침팬지 사회는 가장 힘센 수컷이 우두머리가 되지만, 제인 구달 박사는 침팬지들에게도 연장자에 대한 존경의 개념이 있다 한다. 한 학자는 너무 늙어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수컷 하나가 다른 젊은 수컷들에게 공격받기는커녕, 손만 내밀고 있으면 그 즉시 열매를 나눠 받는 모습을 관찰했다.

또, 나이 들어 기운 없는 어미를 위해 열매를 따다 주거나, 못된 다른 집단 구성원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침팬지 자식들의 이야기들을 비롯해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지 않고 등은 굽었으며 다리는 가늘고 힘이 없어 휘청거렸던 할머니, 와나구마가 무리의 보호 속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는 모습도 소개된 적도 있다.

모계 사회를 이루어 사는 사자도, 나이가 들어 이빨이 다 빠지고 생식 능력을 잃어도 무리에서 추방되지 않고 노년기를 무리 안에서 보낸다. 암사자들은 복잡한 전략을 사용해 협동사냥을 하는데 나이든 암사자는 사냥에 경험이 많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

어른의 경험을 이어받지 못해 위험에 처한 코끼리들

동물학자 비투스 B. 드뢰셔는 '경험의 보고, 즉 연장자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다'라고까지 이야기한 바 있다. 연장자들을 외딴 곳으로 내모는 것은 자신들을 위험(동물에게는 죽음 더 나아가 멸종)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실제 한 자연보호론자는 이러한 지혜를 어른들로부터 배우지 못한 우간다의 코끼리 무리의 이야기를 그 예로 들은 바 있다. 퀸엘리자베스국립공원에 살던 새끼 코끼리들인데, 이들은 어린 시절 같은 무리 어른 코끼리들의 90%를 밀렵으로 잃고 말았다.

어른들의 가르침 없이 자라난 이 새끼 코끼리들은 숲에서 물과 먹이를 제대로 찾지 못하자 마을로 내려와 농작물을 약탈하고 이를 막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등의 문제 행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나이든 어른들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지식은 물론 다양한 지혜, 경험을 물려받지 못해 인간과 싸워야 할 운명(질 것이 분명한, 인간에게 사살될지도 모르는)에 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누이트 문화에서는 연장자에게 대드는 일이 금기인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경험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현대 사회에는 책, 영화 등 수없이 많은 간접 경험들이 존재하지만, 오래 산 사람보다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젊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태인들도 노인들을 오랜 세월 동안 체득한 경험과 지혜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중요한 메신저로 생각한다. 이들은 5천년 역사를 노인들로부터 듣고 배우며 유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키워나간다. 때문에 유태인 젊은이들은 나이 드신 분을 모시고 사는 것, 즉, 오랜 경험을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연장자를 모시고 사는 것을 큰 재산으로 여긴다고 한다. 노인의 늙고 힘없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 내면의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정신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기 때문이다.

동물세계만도 못한 인간 사회

연말이 다가오니, 무의탁 노인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추운 겨울, 꽁꽁 언 가슴을 따스하게 녹여 주고 있다. 그 반면, 순수한 노인 공경의 마음에서인양 어르신들을 위한 '공연장'을 마련해 놓고는 결국 건강보조식품 및 허드렛 물건들을 말도 안 되는 비싼 값에 강매하는 못 되먹은 사람들의 소식이나, 친자식이 노부모를 버리고 도망갔다거나 독거 노인이 혼자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아픈 소식들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2030년경이 되면 고령인구(65세 이상)가 전체 인구의 21%를 상회하는 초(超)고령화 사회가 될 것이라 한다(어이쿠! 그 때쯤이면 나도 노년의 문턱에 서 있을 텐데!). 아직은 힘이 넘치는 60대에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해야 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버림받고 있는 오늘날 어르신들의 모습. 우리 사회가 어르신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한 번 쯤 돌이켜 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CBS 라디오 98.1 MHz <김종휘의 문화공감> 일요일 3부 "김소희의 동물은 말한다"에서도 소개되었습니다.

김소희 기자는 동물칼럼니스트로, 애니멀파크(www.animalpark.pe.kr)의 운영자입니다. 2003년 대한민국 과학콘텐츠 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역저로 <당신의 몸짓은 개에게 무엇을 말하는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CBS 라디오 98.1 MHz <김종휘의 문화공감> 일요일 3부 "김소희의 동물은 말한다"에서도 소개되었습니다.

김소희 기자는 동물칼럼니스트로, 애니멀파크(www.animalpark.pe.kr)의 운영자입니다. 2003년 대한민국 과학콘텐츠 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역저로 <당신의 몸짓은 개에게 무엇을 말하는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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