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다

[분석] 'X파일' 수사가 남긴 것... 물증 놓고 법정공방 예상

등록 2005.12.15 11:22수정 2005.12.15 11:25
0
원고료로 응원
'안기부ㆍ국정원 도청'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 도청수사팀 황교안 2차장검사가 14일 오후 지검청사 브리핑룸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안기부ㆍ국정원 도청'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 도청수사팀 황교안 2차장검사가 14일 오후 지검청사 브리핑룸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국민의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국내 주요 인사 1800여명을 대상으로 상시적 불법감청을 자행했다."

이는 지난 11월 15일 검찰이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을 구속하면서 발표한 범죄혐의 사실의 핵심 내용이다. 모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만인 12월 14일 검찰이 발표한 '중간 수사 결과'는 이와 달랐다. 검찰은 국내 주요 인사 1800여명의 명단을 제시하지 못했다.

지난 7월 21일 이른바 'X파일'의 공개로 촉발된 '안기부·국정원 도청·불법감청 관련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가 5개월만인 14일 공표되었다.

검찰이 이날 발표한 '안기부·국정원 도청·불법감청 관련 사건 중간 수사결과'에서 스스로 분류한 수사 내용은 크게 ▲국정원·안기부 도·감청 사건 ▲불법 도·감청 자료 유출 및 내용 공개 관련 사건 ▲X파일 내용 관련 고발 사건 등 세가지이다.

사실상 최종 수사결과인 검찰의 중간 수사결과의 결론은 ▲김대중(DJ)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불법감청은 '법률적 유죄' ▲김영삼 정부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도청은 '도덕적 유죄' ▲불법도청 '피해자'인 삼성의 뇌물죄는 '무혐의'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결론'은 그동안의 관련자 사법처리 결과와 수사팀 브리핑 등에서 이미 예고돼 있었다. 검찰은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과 공소시효 완성으로 그 결론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막상 100쪽이 넘는 수사결과로 정리된 유무죄와 처리결과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번 수사에서 내세운 검찰의 첫번째 입장은 '성역없는 수사로 역사적 사건의 실체진실 규명'이었다. 검찰은 이를 위해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히 수사하고, 국민 앞에 한 점의 의혹도 남김없이 실체를 규명하겠다는 의지로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자평했다.


검찰은 또 이 사건 수사를 위해 2차장 검사의 총괄 지휘 아래 ▲부장검사 2명 ▲검사 13명 ▲수사관 27명 ▲대검 전산팀 등 수사지원팀 20명 등 총 62명을 투입해 연인원 460여명을 소환조사했다. 그 가운데는 전직 안기부장·국정원장 5명과 전현직 국정원 직원 132명이 포함돼 있다. 검찰은 또 정부수립 이후 첫 국정원 압수수색이라는 개가도 울렸다.

불법감청 발 못 붙이도록 한 것은 큰 성과


임동원(좌측), 신건 전 국정원장 등이 지난 11월 15일 오후 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구치소로 향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을 나서는 장면. 두 원장의 혐의에 대해 치열한 법적 공방이 예상된다.
임동원(좌측), 신건 전 국정원장 등이 지난 11월 15일 오후 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구치소로 향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을 나서는 장면. 두 원장의 혐의에 대해 치열한 법적 공방이 예상된다.연합뉴스 이상학
성과가 없지는 않다. 우선 검찰은 김대중 정부 시절의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을 구속기소하는 성과를 올렸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장세동 전 안기부장, 김대중 정부 시절의 권영해 전 안기부장처럼 정권이 바뀌어 전직 국가정보기관장이 '정치 관여'라는 불법행위와 관련 구속된 전례는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처럼 재직중의 업무와 관련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이 함께 구속되기는 헌정사상 처음이다.

검찰이 밝힌 이들의 불법행위는 국정원이 안기부 시절인 96년부터 개발을 시작한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R2와 이동식휴대폰 감청장비 CAS(카스)를 운용해 '조직적, 계획적인 대규모 불법감청'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특히 이들이 "1800여명에 달하는 주요인사를 대상으로 불법 감청하고, 각종 현안 발생시마다 집중 감청했다"고 강조했다.

또 김영삼 정부 시절의 불법도청에 의한 이른바 '미림팀 보고서'가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에게 유출되고, 그 '독수독과'가 안기부장의 주례보고서 내용에 포함되어 김영삼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것으로 검찰 수사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특히 김현철씨와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미림팀 도청자료를 통해 취득한 정보를 갖고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는 불법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검찰은 그 증거로 ▲총 554회의 도청행위가 수록된 전 안기부 미림팀장 공운영의 녹음테이프 274개와 녹취보고서철 13권 ▲공씨 집에서 압수한 300매 분량의 '주요인물 접촉동향' 보고서철 1권 등을 제시했다. 검찰은 이외에도 김영삼 정부 시절에 유선전화 및 아날로그 휴대폰 불법감청이 추가로 이뤄졌음을 확인했다.

아울러 검찰은 이번 수사를 통해 국정원 불법도·감청의 '족보'(族譜)를 훤히 꿰뚫게 되었다. 사법처리를 통해 다시는 국가정보기관에 의한 불법감청이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한 것도 눈에 안보이는 큰 성과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는 예상대로 '형평성'에 크게 어긋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검찰은 처음부터 공소시효 만료를 주장했다. 그 대신에 검찰은 김영삼 정부 시절의 불법도청 행위에 대한 철저한 조사결과를 공개해 여론의 심판을 받게 하겠다고 했다.

'1800명 명단' 확보 못해

여기서 제기하는 '형평성'은 '공소시효에 따른 형평성'이 아니다. 검찰은 중간 수사결과 발표에서 이와 관련된 중대한 허점을 드러냈다.

검찰에 따르면 94년 7월부터 97년 9월까지 총 1170회의 회합 내용을 접촉 인물, 일시, 장소, 비고 등으로 작성한 공운영 팀장의 '주요인물 접촉동향' 보고서에는 무려 연인원 5400명의 명단이 기재돼 있다. 120분 분량의 녹음테이프 274개와 함께, 국가 정보기관에 의한 '조직적, 계획적인 대규모 불법도청'이 이뤄졌음을 입증하는 '물증'이다.

그 대상자에는 정당 대표와 전현직 국회의원 등 여야 정치인, 국무총리·장관·청와대 비서실장·수석비서관·경찰청장 등 고위 공무원, 언론사 주요 간부, 법조계 인사 등이 총망라돼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김영삼 정부는 열거할 수 있는 정보기관의 불법행위 가운데서도 가장 '질 나쁜' 정치사찰 목적의 도청을 자행한 것이다.

반면에 김대중 정부 시절의 불법감청과 관련, 검찰은 "국정원 직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국내 주요인사에 대한 휴대전화번호 입력규모는 약 1800여명으로 파악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명단은 2002년 4월 불법감청장비 폐기시 함께 폐기되었지만, 직원들의 진술에 의해 주요인사의 명단을 상당부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또 이와 관련 "1800여명을 신분별로 분류하면 정치인 55%, 언론인 15%, 경제인 15%, 고위공직자 5%, 시민·사회단체 간부 5%, 노조간부 5% 가량 된다"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통신비밀보호법상 불법감청 자료의 공개 및 누설이 금지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처벌하는 규정 등을 고려해 불법감청 대상자의 실명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마치 1800명의 명단을 '물증'으로 확보하고 있지만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국정원과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검찰 수사팀이 밝힌 '1800명'이라는 숫자는 국정원 직원들의 진술을 토대로 추정한 것일 뿐, 이를 입증할 구체적인 '명단'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도 일문일답에서 이를 시인했다.

실제로 검찰이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을 기소하면서 적시한 공소사실에 포함된 불법감청 사례도 두 사람을 합쳐서 30여건밖에 안된다. 그중 상당수는 이미 한나라당이 2002년 대선직전에 국정원 도청문건이라며 폭로한 39건 중 13건이다.

검찰은 중간수사결과 발표에서 "전현직 국정원 직원 36명 등 총 40명의 조사자료를 넘겨받아 수사에 활용했다"고 밝혔다.

물증 놓고 법정공방 예상

검찰은 11월 15일 두 전직 원장을 구속하면서 "국민의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국내 주요 인사 1천800여명을 대상으로 상시적 불법감청을 자행했다"고 발표했으나 14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그 명단을 제시하지 못했다.
검찰은 11월 15일 두 전직 원장을 구속하면서 "국민의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국내 주요 인사 1천800여명을 대상으로 상시적 불법감청을 자행했다"고 발표했으나 14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그 명단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미 <오마이뉴스>에서 지적했지만, 국정원은 지난 추석 전후에 현직 직원 20여명을 불러 "검찰 수사에 협조하면 사법처리되지 않도록 해주겠다"며 "각자 불법감청 사례 한 건씩만 적어서 제출해 달라"고 회유한 바 있다. 국정원은 그 자술서를 취합해 검찰에 넘겨 검찰 조사에 활용하도록 했다. 20여명의 현직 직원들이 '자술'한 20여건이 고스란히 공소사실이 된 것이다.

결국 검찰이 국정원 직원들의 진술을 통해 확인한 불법감청 사례는 10여건밖에 안된다는 얘기이다. 이 10여건 사례에 대해서마저 두 전직 원장은 12일 제1회 공판에서 전면 부인했다.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의 자살로 고비를 맞았던 검찰 수사는 두 전 국정원장을 기소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이번 중간 수사결과를 보면 유죄로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R2와 CAS 같은 감청장비가 이미 폐기된데다 감청장비 사용기록이나 감청의 결과물인 '통신첩보 보고서' 등 뚜렷한 물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검찰은 1800여명의 휴대전화번호를 입력해 상시적으로 감청을 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중간 수사결과 자료 말미에 국정원 종합처리팀장이 샘플로 작성한 '통신첩보' 보고서 1장을 달랑 첨부했을 뿐이다. 검찰이 발표한 범죄사실의 공식대로, 주요인사 1800명을 상시적으로 감청해 그 결과를 '통신첩보' 보고서 형태로 원장과 차장에게 매일 조석으로 보고했다면 적어도 수만장의 '통신첩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단 한장도 못찾은 것이다.

이 또한 치열한 법정공방이 벌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검찰은 특히 이 사건의 본질인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의혹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진술에만 의존해 전원 무혐의 처리했다. 따라서 '형평성에 어긋나는 끼워맞추기 수사'라는 총체적 의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번 수사에 대한 총평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네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했노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