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좌측), 신건 전 국정원장 등이 지난 11월 15일 오후 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구치소로 향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을 나서는 장면. 두 원장의 혐의에 대해 치열한 법적 공방이 예상된다.연합뉴스 이상학
성과가 없지는 않다. 우선 검찰은 김대중 정부 시절의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을 구속기소하는 성과를 올렸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장세동 전 안기부장, 김대중 정부 시절의 권영해 전 안기부장처럼 정권이 바뀌어 전직 국가정보기관장이 '정치 관여'라는 불법행위와 관련 구속된 전례는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처럼 재직중의 업무와 관련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이 함께 구속되기는 헌정사상 처음이다.
검찰이 밝힌 이들의 불법행위는 국정원이 안기부 시절인 96년부터 개발을 시작한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R2와 이동식휴대폰 감청장비 CAS(카스)를 운용해 '조직적, 계획적인 대규모 불법감청'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특히 이들이 "1800여명에 달하는 주요인사를 대상으로 불법 감청하고, 각종 현안 발생시마다 집중 감청했다"고 강조했다.
또 김영삼 정부 시절의 불법도청에 의한 이른바 '미림팀 보고서'가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에게 유출되고, 그 '독수독과'가 안기부장의 주례보고서 내용에 포함되어 김영삼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것으로 검찰 수사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특히 김현철씨와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미림팀 도청자료를 통해 취득한 정보를 갖고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는 불법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검찰은 그 증거로 ▲총 554회의 도청행위가 수록된 전 안기부 미림팀장 공운영의 녹음테이프 274개와 녹취보고서철 13권 ▲공씨 집에서 압수한 300매 분량의 '주요인물 접촉동향' 보고서철 1권 등을 제시했다. 검찰은 이외에도 김영삼 정부 시절에 유선전화 및 아날로그 휴대폰 불법감청이 추가로 이뤄졌음을 확인했다.
아울러 검찰은 이번 수사를 통해 국정원 불법도·감청의 '족보'(族譜)를 훤히 꿰뚫게 되었다. 사법처리를 통해 다시는 국가정보기관에 의한 불법감청이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한 것도 눈에 안보이는 큰 성과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는 예상대로 '형평성'에 크게 어긋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검찰은 처음부터 공소시효 만료를 주장했다. 그 대신에 검찰은 김영삼 정부 시절의 불법도청 행위에 대한 철저한 조사결과를 공개해 여론의 심판을 받게 하겠다고 했다.
'1800명 명단' 확보 못해
여기서 제기하는 '형평성'은 '공소시효에 따른 형평성'이 아니다. 검찰은 중간 수사결과 발표에서 이와 관련된 중대한 허점을 드러냈다.
검찰에 따르면 94년 7월부터 97년 9월까지 총 1170회의 회합 내용을 접촉 인물, 일시, 장소, 비고 등으로 작성한 공운영 팀장의 '주요인물 접촉동향' 보고서에는 무려 연인원 5400명의 명단이 기재돼 있다. 120분 분량의 녹음테이프 274개와 함께, 국가 정보기관에 의한 '조직적, 계획적인 대규모 불법도청'이 이뤄졌음을 입증하는 '물증'이다.
그 대상자에는 정당 대표와 전현직 국회의원 등 여야 정치인, 국무총리·장관·청와대 비서실장·수석비서관·경찰청장 등 고위 공무원, 언론사 주요 간부, 법조계 인사 등이 총망라돼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김영삼 정부는 열거할 수 있는 정보기관의 불법행위 가운데서도 가장 '질 나쁜' 정치사찰 목적의 도청을 자행한 것이다.
반면에 김대중 정부 시절의 불법감청과 관련, 검찰은 "국정원 직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국내 주요인사에 대한 휴대전화번호 입력규모는 약 1800여명으로 파악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명단은 2002년 4월 불법감청장비 폐기시 함께 폐기되었지만, 직원들의 진술에 의해 주요인사의 명단을 상당부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또 이와 관련 "1800여명을 신분별로 분류하면 정치인 55%, 언론인 15%, 경제인 15%, 고위공직자 5%, 시민·사회단체 간부 5%, 노조간부 5% 가량 된다"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통신비밀보호법상 불법감청 자료의 공개 및 누설이 금지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처벌하는 규정 등을 고려해 불법감청 대상자의 실명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마치 1800명의 명단을 '물증'으로 확보하고 있지만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국정원과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검찰 수사팀이 밝힌 '1800명'이라는 숫자는 국정원 직원들의 진술을 토대로 추정한 것일 뿐, 이를 입증할 구체적인 '명단'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도 일문일답에서 이를 시인했다.
실제로 검찰이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을 기소하면서 적시한 공소사실에 포함된 불법감청 사례도 두 사람을 합쳐서 30여건밖에 안된다. 그중 상당수는 이미 한나라당이 2002년 대선직전에 국정원 도청문건이라며 폭로한 39건 중 13건이다.
검찰은 중간수사결과 발표에서 "전현직 국정원 직원 36명 등 총 40명의 조사자료를 넘겨받아 수사에 활용했다"고 밝혔다.
물증 놓고 법정공방 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