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연행길을 걸으며 미래를 구상한다

[서평]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등록 2005.12.16 01:23수정 2005.12.16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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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푸른역사

연행(燕行)이란 연경행(燕京行)의 줄임말로 연경은 원・명・청의 수도였던 북경의 옛 수도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 후기 북경을 다녀오는 사절단을 연행사(燕行使)라 하였다.

당시 연행길은 보통 5개월 남짓 걸리는 힘든 길이었으나 기상이 크고 지적 탐구심이 넘친 선비들에게는 넓은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호기로 여겨졌다.


우선 연행이란 단어를 살펴보자. 조선조 초기 명나라로 향하던 중국 사행은 천자에게 조회하러 간다는 뜻의 '조천(朝天)'이란 말을 쓴데 비해, 오랑캐의 나라였던 청나라에 대해서는 연행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사용한 단어 하나만을 보아도 조선 후기 식자들이 겪은 이념과 실상 사이의 괴리를 엿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청에 조공을 하며 문화적인 영향을 받으면서도, 내심으로는 현실을 외면하고 소중화주의에서 발로된 왜곡된 우월감을 지키려 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는 전쟁에서 패배하고도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지배층의 안위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연행길에서 돌아온 이덕수는 영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입만 열면 청나라 사람들을 가리켜 되놈이라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도리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지식인들의 콤플렉스에 대한 반성으로 18세기 적극적인 청의 문화 수용을 주장한 자들이 있었으나, 그나마도 고운 눈길을 받지 못했다.


"이제 중국의 법에 대해 '배워야 한다'라고 말하면 떼지어 일어나 비웃는다. 필부가 원수를 갚고자 할 때 원수가 날카로운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칼을 빼앗을 방법을 고민하는 법이다…오늘날 사람들이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한다면 먼저 누가 오랑캐인지를 분간해야 한다"

박제가의 이런 날카로운 비판 또한 울분과 탄식으로 그칠 뿐,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득권 확보를 위해 민족정기나 선비정신을 팔아먹는 행위는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


청나라는 조선조에 오랑캐의 나라였다. 과연 이러한 청나라는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나라인가. 변발한 오랑캐에, 자신들의 말과 습속마저 잃어버린 만주족에 지나지 않는가. 부패하여 서구 열강에게 사정없이 뜯기고 만 나약한 국가였던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청에 대한 인식은 조선조 지배층이 남겨준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청을 세우는 기틀이 된 두 왕의 발언을 잠시 엿보자. 누르하치는 조・명 연합군을 무찌르고 조선에 국서를 보낸다.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명의 핍박이 너무 심해서이다…왕은 우리 두 나라 사이에는 평소 어떠한 원한이나 사단이 없다고 하였으니, 우리와 함께 힘을 모아 명에 복수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명을 도왔으니 배반을 원치 않는가? 자세히 밝혀라"

또한 청태종은 황제의 예를 거하는 자리에서 조선의 사절들이 예를 따르지 않자 다음과 같이 선유한다.

"조선 사신의 무례를 낱낱이 들어 말하기 어렵다…짐은 한때의 작은 분노로써 분풀이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도 사신으로 온 자를 살육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조회이겠는가? 불문에 붙인다.

적통만을 들어 큰 것을 논할 것인가, 아니면 진정 큰 것을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질 것인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남겨진 숙제와 같다.

"현실의 사정이야 어떻든 정신적인 승리에 자족하는 '정신 승리주의'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역사적 실상이 보일 것이고, 실상을 보아야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연행길을 가던 옛 선비들이라고 이런 마음이 없었을 리 없다. 그들은 요동을 넘어가는 매 길목마다 고토(古土)를 생각하고,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지적인 탐구심을 발동하며, 호기어린 발언이나 장탄식을 뿜어낸다.

<조선의 지식인들과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는 압록강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연행로를 세 차례 답사하며, 옛 선비들이 남겨놓은 문헌과 유적을 통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지혜를 오늘날에 투영한다.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서도, 과거 조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제다. 이 책을 따라 옛 선비들과 만나는 것은 연행길을 가는 것만큼이나 먼 길일 수도 있지만,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연행길 곳곳은 먼 선조의 땅인 동시에, 우리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반년이 걸리는 먼 길이었으나, 지금 우리에게는 함부로 갈 수도 없는 이국의 땅이다. 이런 역사의 업보를 짊어진 우리에게 순암 안정복의 말은 한마디 위로와 채찍으로 다가온다. 그는 북방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글에서, 영토를 찾고 말고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내력과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연행은 지난 일이고, 연행로 또한 과거의 길이다. 옛길을 탐색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이지만, 거기서 건강한 미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역사는 이해하는 만큼 쓸 수 있고, 쓸 수 있는 만큼 만들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덧붙이는 글 | 책이름: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저자 : 김태준,이승수,김일환 지음
출판사 : 푸른역사(2005)

덧붙이는 글 책이름: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저자 : 김태준,이승수,김일환 지음
출판사 : 푸른역사(2005)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김태준.이승수.김일환 지음,
푸른역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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