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머리 없음에 대해

화재 난 회사 월급 하루 늦는다고 뛰쳐 나온 이들을 상담하며

등록 2005.12.17 14:20수정 2005.12.1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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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좀 옮기고 싶어요."


오는 일요일 행사 준비로 일이 밀려 있던 터라 저녁 8시에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따라 들어온 세 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대뜸 하는 말이었습니다.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던 저는 "지금 바쁜데, 내일 이야기하면 안 될까?"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나가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장님이 월급을 주지 않아요."

바쁘다고 말했는데도 물러설 기미가 없자, 오죽했으면 그러랴 싶어 할 일이 산더미 같았지만 결국 세 명에게 자리에 앉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제가 쉼터에 없는 동안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적은 상담접수 일지를 내밀었습니다.

"급여명세서와 근로계약서 좀 봅시다."
"급여명세서는 없는데요."
"그럼 근로계약서만 줘 봐요"

근로계약서를 잠시 살피는 동안 앞에 있던 세 명 중 한 명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더니 제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누런 월급봉투였습니다. 봉투에는 간단하게 본봉 100만원, 식대 15만원, 수당 27만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공제액 없이 실 수령액이 142만원이었습니다. 11월 급여였습니다.


"못 받은 월급이 언제예요?"
"……12월."

"월급날이 여기 보면 15일인데 맞아요?"
"……."


어이가 없었습니다. 월급 하루 밀렸다고, 회사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서 근무처를 변경하는 걸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대로라면 어제가 월급날이었는데, 오늘 월급 안 준다고 회사 나와서 이러는 거예요?"
"월급 말고도 문제 많아요."

"무슨 문제요?"
"회사 불났어요."

"언제?"
"11월 26일"

"그럼 회사에서 불이 나서 형편이 좋지 않아서 월급이 하루 늦어진 거잖아요."
"만날 야간만 하라고 해요."

"혹시 다른 데 도와 달라고 했던 곳 있어요?"
"노동부 갔었어요."

"그곳에서 뭐라고 그래요? 회사 옮길 수 있다고 하던가요?"
"……."

"다른 곳에도 도와 달라고 갔었지요?"
"……."

인천에서 왔다는 세 명은 우리 쉼터에 오기 전에 다른 단체에 들려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이 없자, 용인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뭐라고 그래요? 똑같죠? 나라고 다른 사람이 아니에요. 외국인에게 본봉 100만원 주는데 많지 않아요. 그런데 단 하루 월급 늦는다고 회사 나오면 욕하지 않을 사람 없어요. 회사 불이 났으면 한국 사람도 월급이 늦었을 거예요. 사장님께 잘 말해 줄 테니까, 가서 다시 일하도록 하세요"라고 말한 후 회사로 전화를 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연결이 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리는 것으로 봐서 야간작업 중인 것 같았습니다. 전화를 받아든 업체 대표는 외국인들이 회사를 나간 사실에 대해 매우 섭섭해 했습니다.

"우리 회사 불이 어떻게 난 줄 아세요? 그 사람들 때문이에요. 회사 기숙사에 살기 때문에 아침마다 기계 시운전을 그 사람들에게 맡겨요. 그런데 그날(사고 난) 춥다고 기계 돌려놓고 방에 들어가서 자 버렸어요.

시운전을 돌리는 기계가 민감해서 과열되지 않도록 늘 주의를 시킵니다. 지켜보다가 온도 조정을 하지 않으면 큰 일 나니까 꼭 지켜보라고. 대신에 본봉도 올려 줬어요. 외국인들 본봉이 백만 원인 곳이 이곳 남동공단에 어디 있나 물어보세요.

그랬는데, 불이 났으니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외국인에게 손해 배상을 시키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그래도 6개월 넘게 같이 일한 사람들인데. 다시 회사 일으켜 세우려고 옆 건물 빌려서 그 사람들 다독거리며 야간작업까지 해 가며 거래처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데, 참 인정머리가 없네요. 가라고 하세요. 회사 옮기라고 하세요."

저 역시 전후사정을 듣고 보니, 앞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이 인정머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 두라고 하니까, 알아서들 해 봐요. 본인들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월급 하루 늦는다고 불평하면 어디 가서도 일 못해요. 가 봐요."

불이 난 회사에서 어떤 말 못할 일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와서 타 단체에서 상담한 사실을 속이는(상담일지에 없다고 기록) 등의 상담 태도나, 사건 정황으로 봐서 회사 측에 큰 문제가 없었다는 판단에 따라 상담을 종결하겠다고 하자, 풀이 죽은 세 사람은 짐을 싸들고 나갔습니다.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참 인정머리 없다'는 생각 외에 굳이 나서지 않아도 제 앞가림을 충분히 할 사람들이라는 판단이 들어 상담을 접었습니다. 그래도 도와 달라고 찾아 온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입장이 마음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인정머리 없다'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데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하룻밤이라도 재워 보낼 걸' 하는 아쉬움에 '나야말로 인정머리 없이 매몰찼다'는 자책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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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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