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연분홍 꽃을 보며 옛 추억에 젖습니다

등록 2005.12.18 19:43수정 2005.12.1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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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칠봉 서원 등산로에서 꺾어다 놓은 지 꼭 21일만에 꽃봉오리가 터진 것입니다. 삼한사온이란 말이 사라진 세상에는 칼바람 추위와 폭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 겨울 추위 속에서 피어난 진달래꽃을 처음 본 아내는 단발머리 시절로 돌아간 듯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습니다.


이기원
칠봉 서원 등산로에는 유난히 진달래나무가 많았습니다. 잎은 모두 지고 봄이 되어야 꽃잎 피어날 봉오리만 맺힌 채 서 있는 진달래나무를 보며 아내가 물었습니다.

"이거 좀 꺾어갈까"

그거 좋은 생각이라며 진달래 가지를 뚝뚝 꺾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 침침한 겨울 방을 환하게 밝혀주던 진달래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나뭇짐에 얹혀 있던 진달래 가지를 가져다가 소주병에 꽂아 방안에 두었습니다. 까만 그을음 피어오르던 등잔불과 더불어 연한 분홍빛 진달래꽃이 침침한 방을 환하게 밝혀주었습니다.

이기원

"글쎄."

아내의 제안에 선뜻 맞장구를 치진 못했습니다. 둘째 광수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녀석은 아는 만큼 실천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튀김을 만들다 프라이팬에 남은 폐식용유를 무심코 싱크대로 버리다가 녀석에게 걸리면 환경오염을 내세우며 잔소리를 합니다. 녀석은 유독 자연 환경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녀석이 진달래 가지를 꺾어들고 들어가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조금만 꺾어 가자."

잠시 망설이던 아내가 진달래 가지를 꺾었습니다.


"광수가 뭐라고 하면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꼭 안아주지 뭐."

진달래 가지를 꺾던 아내가 돌아보며 웃었습니다.

다행인지 광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진달래 가지를 조그만 오지 항아리에 꽂아 오디오 위에 두었습니다.

이기원
그 가지에서 오늘 꽃이 핀 것입니다. 봄철 산에 핀 진달래를 여러 번 보았지만 겨울철 집에서 핀 진달래를 보는 건 처음인 준수와 광수는 신기하다며 주변을 맴돌며 보고 또 봅니다.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자랑해야 한다며 카메라를 들고 서로 먼저 찍겠다고 야단입니다.

"거실이 환해진 거 같지 않니?"
"맞아요."

한겨울에 피어난 진달래꽃은 봄철 진달래보다 연한 분홍색입니다. 눈부신 햇살을 받지 못한 채 피어났기 때문입니다. 진달래 사진을 찍느라 야단인 아이들과 연분홍 진달래를 바라보며 문득 옛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떠오르던 추억은 어느새 연분홍 그리움이 되어 밀려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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