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30회

등록 2005.12.19 08:20수정 2005.12.1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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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천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모용수의 표정으로 보아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담천의가 원하던 내용이 분명했다.

“그는 그래도 전통이 있는 세가에서 태어났소. 하지만 그를 낳은 모친은 그 세가의 하찮은 시비였고, 그는 가주(家主)의 피를 받았으나 그 세가에서는 가주의 혈육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소. 결국 주위에서 말이 많아지자 그 세가에서는 그와 그의 모친을 내쫓았소.”


“……!”

“그 뒤 억울했던 그의 모친은 자살했고 그는 고아가 되었소. 하지만 그것이 전화위복이었는지 그는 엄청난 기연(奇緣)을 얻게 되었소.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던 그런 기연 말이오. 그는 고아였지만 자질이 뛰어나고 품성도 비뚤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해심이 넓은 사람이었소.”

모용수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담천의는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말이 중간에 끊기는 것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쩌면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했음에도 태연히 이 마차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알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가문은 그를 버렸지만 그는 가문을 버리지 않았소. 가문은 그를 냉대했지만 그는 가문에 대해 원망을 하거나 복수할 생각을 가지지 않았소. 그는 자신이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족(皇族)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에 만족했소. 아무리 자신의 가문이 모질게 대해도 그는 그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했소.”

“……!”


“그 대신 그는 중원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소. 황족의 혈통을 받은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가문이 이 중원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게 된 것이오. 더구나 원을 몰아내고 힘없고 굶주린 농민들을 위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소. 그 얼마나 훌륭한 생각이오? 그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반원의 주축이 되었던 백련교에 가입했소.”

하지만 이미 백련교는 골육상잔의 비극 속에서 한 명의 영웅을 탄생시키고 있었다. 탁발승으로 구걸이나 하러 다니던 인물이, 끼니를 때우기 위해 백련교에 가입했던 인물이 강남지주들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는 대명을 세우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는 천민 출신의 영웅이 탄생했음을 기꺼이 환영했소. 원을 몰아내고 대명이 들어서는 것에 박수갈채를 보냈소. 가난한 자, 헐벗고 굶주림에 지친 자, 한 뙈기의 땅에 의지해 입에 풀칠을 하고 사는 농민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 희망은 곧 커다란 실망으로 변해버렸소. 그는 천민 출신이었지만 그 어떠한 악질적인 토호보다 더 지독한 자였소.”

민초를 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력하게, 더욱 독점적으로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자신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동료들까지도 그는 서슴없이 베었던 것이오. 주원장은 그런 자였소. 영원히 자신의 혈족이 이 중원을 차지하고 대대손손 부와 영화를 누리게 하고자 혈안이 되었던 자였단 말이오.”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주원장이 역대 어떠한 황권보다도 강력한 황권을 세우기 위해 피로 점철된 숙청이 이어졌음은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주원장에 실망한 그는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세우기로 마음먹었소.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소. 그는 주원장을 몰아낼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그 어디와도 손을 잡았고, 자신 역시 그러한 조직에 가입했소.”

스스로 감정이 고양되었는지 모용수의 억양이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 헌데 그 때였다.

히이이---잉---
쿠-- 쿵----

말울음소리와 함께 굉음이 들리며 마차가 부서질 듯 흔들리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마차에 타고 있던 세 사람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하지만 쇄금삭에 묶여있는 담천의는 오히려 이 경우에 더 편한 것 같았다. 밖에서 마부인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웬 놈이냐! 끄윽--”

마부로 보이는 인물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고 대신 비명소리가 들렸다. 누가 마차를 막아 선 것일까?

“빌어먹을… 헉헉… 확실히 좋은 마차라 그런지 따라붙으려니 무지하게 힘이 드는군. 헉헉… 더구나 마차를 세우려 죄 없는 말을 죽였으니 성불하기는 애당초 틀렸군.”

장난기 섞인 목소리였다. 급히 달려왔는지 급한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분명 주루에 나타났던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 말을 하던 모용수의 얼굴에 매우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일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따라왔군. 그동안의 정을 보아 직접 손을 쓰지 않으려 했는데….”

모용수의 말투에서 진한 살기가 배어나왔다. 자신의 예상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와중에서 저 인물이 자꾸 일을 꼬이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담천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사내가 누군지 생각은 나지 않았지만 너무 성급하게 일을 만들고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너무 성가시게 하는구려.”

담천의의 말에 모용수와 일엽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은 소제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오. 지금 저 사람이 마차를 세운 것은 아마 담형을 도우려는 걸 거요. 헌데 반겨야 할 담형이 어찌 성가시다고 하시오?”

담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휴우… 나는 모용형의 말을 듣기 위하여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끈기 있게 앉아 있는 중이오. 헌데 저 사람이 그런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구려.”

“당신의 말은 마치 언제든지 이 마차를 떠날 수 있는데도 그 사연을 듣고 싶어 참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담천의의 여유 있는 태도에 신경이 거슬린 듯 일엽이 냉소를 치며 말했다. 담천의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저 사람 못지않게 당신도 몹시 성가시게 하는구려. 지금 나는 모용형과 담소 중이오. 당신이 낄 자리가 아니란 말이오. 하지만….”

담천의는 일엽의 신경을 박박 긁고 있었다. 사실 담천의의 말은 일엽을 아주 무시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 이미 모용수와 상하관계를 분명히 했으면 윗사람 말에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금방 손을 쓸 태세였다. 하지만 담천의가 말끝을 흐리다 다시 말을 잇자 잠시 참는 듯 했다.

“당신은 꽤 똑똑하구려. 당신 말은 아주 정확히 맞는 말이오.”

“이 자식이…?”

하지만 계속해서 빈정대는 투로 비웃자 갑작스럽게 일엽의 주먹이 담천의의 턱을 향해 날아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했다. 주먹에는 은은한 경력이 실려 있어 턱에 맞게 된다면 턱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좁은 마차 안이라 두 걸음만 뗀다면 코가 맞닿을 정도의 좁은 공간이어서 담천의가 피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스읏----!

하지만 일엽의 주먹은 기이하게도 담천의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그의 턱에 난 짧은 수염을 스치듯 지나갔을 뿐 턱을 가격하지 못했다. 담천의가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라 생각한 일엽이 너무 가볍게 휘두른 것이지만 피한 것은 의외였다.

비록 일성 정도의 내력을 실은 것이라 해도 점창(點蒼)의 독문비기인 육맥신검(六脈神劍)을 변형해 권으로 펼친 것이기 때문에 그리 쉽게 피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일엽은 황당한 표정과 함께 다시 연이어 양쪽 주먹을 날렸다. 반드시 담천의의 입을 짓뭉개버리겠다는 살기가 흘렀다.

찰---칵----!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담천의를 옭아매고 있던 쇄금삭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풀어지며 마차 벽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동시에 담천의는 날아오는 주먹을 옆으로 피하며 오히려 우수로 일엽의 팔뚝을 밀어냄과 동시에 팔꿈치로 일엽의 가슴 아래에 있는 기문혈(期門穴)을 타격해 가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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