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시즌 맞은 호주... 제2의 인종폭동은 없다?

[해외리포트] 시드니 시민들, 캐럴 부르며 인종적 하모니 촉구

등록 2005.12.19 18:34수정 2005.12.1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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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평화)!"
- 12월 18일 호주 시드니 크로눌라 비치에 새겨진 구호


12월 18일은 호주에서 인종폭동이 일어난 지 꼭 일 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4일 호주 시드니의 크로눌라 비치에서는 백인 수상안전요원과 레바논계 호주인(이하 레바니스) 청년들 사이에서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안전요원이 규정을 위반했다고 하자 레바니스들은 이를 인종차별로 받아들인 것.

결국 11일 시드니를 대표하는 크로눌라 비치에는 5천여 명이 넘는 백인계 호주인들이 모여 "중동계 놈들을 호주에서 쫓아내자"고 외치며 레바니스들에게 욕설과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은 결국 레바니스의 복수를 낳았고 그들은 무고한 백인 시민을 구타하고 수백 대의 차량을 파괴했다.

a 크로놀라 비치를 순찰하는 경찰들. 치안당국의 강력한 대응 덕분에 12월 18일로 예고됐던 모슬렘의 반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로놀라 비치를 순찰하는 경찰들. 치안당국의 강력한 대응 덕분에 12월 18일로 예고됐던 모슬렘의 반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 윤여문

다행히 경찰 진압으로 폭력 사태는 가라앉았지만 그 불씨가 완전 진화된 것은 아니다. 레바니스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외치며 12월 18일을 인종차별적인 백인을 응징하는 '디데이'로 선포했다.

잃어 버린 축제... 시드니에 감도는 불안

a "할 만큼 했다"면서 화해를 촉구하는 럭비 스타들.

"할 만큼 했다"면서 화해를 촉구하는 럭비 스타들. ⓒ Daily Telegraph

하지만 우려했던 제2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치안당국의 대규모 진압작전과 "그동안 할 만큼 했다(Enough is enough)"는, 자제를 촉구하는 호소로 일단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앵글로색슨계와 중동계 리더들은 적극적인 화해 제스처를 보였고 인종적 하모니와 평화를 촉구하는 평화대행진이 시드니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펼쳐졌다.

호주의 12월과 1월은 평균 30도를 웃도는 한여름이다. 태양빛이 작렬하는 바다에서 12월을 맞기 위해 지구의 반대편 북반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무엇보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호주의 최대 명절이자 대표적인 관광상품이다. 하지만 예기치 않았던 인종폭동의 소용돌이에 시드니사이더스(Sydneysiders, 시드니 시민의 애칭)는 크리스마스와 축제, 바다를 모두 잃어 버렸다.

호주의 유명작가이면서 <시드니모닝헤럴드>의 대표적인 논객 데이비드 마(David Marr)는 12월 19일자 칼럼에서 "시드니가 갑자기 검문검색을 하는 경찰관과 흉흉한 루머로 가득한 도시가 됐다"고 개탄하면서 "시드니가 하루 빨리 정상을 찾아서 시민과 해변 사이를 차단하고 있는 경찰관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는 이?' 폭동 조심에 강력치안으로 맞선 호주

레바니스의 디데이를 앞두고 가장 바쁘게 움직인 사람들은 바로 치안당국. 지난 18일 세계적인 관광도시 시드니의 서부와 동남부 지역은 경찰국가를 방불케했다. 경찰 차량이 곳곳에 진을 쳤고 도로차단용 바리케이드도 설치됐다. 크리스마스를 즐기려던 관광객들은 계속되는 검문검색에 시달려야 했다.


a 시드니 어번 지역에 위치한 모슬렘 사원.

시드니 어번 지역에 위치한 모슬렘 사원. ⓒ 김은

한편 호주의 정치인들과 치안당국은 '법과 질서'를 되뇌면서 치안을 위한 폭동진압 관련법을 개정하고 엄벌 위주의 단속에 들어갔다.

뉴사우스웨일스(이하 NSW)주 하원은 폭동시 경찰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법안을 여야 모두의 찬성으로 통과 시켰고 모리스 예마 NSW주 총리는 "무제한으로 경찰을 동원해 인종폭동에 가담하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띄웠다.

개정된 법에 따르면 경찰은 소요 진압을 위해 차량통행지역 제한을 선포할 수 있고 무제한 검문검색을 물론이고 주류 판매 제한과 술집의 영업시간도 단축 시킬 수 있다. 특히 휴대전화의 통화 내역, 특히 지난 번 폭동을 전파하는 수단이었던 문자 메시지도 체크할 수 있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차량과 휴대전화를 1주일 동안 압류할 수도 있다.

19일 아침 채널7의 <선라이스>에 출연한 켄 몰로니 NSW주 경찰청장은 "인종폭동의 근본적인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경찰의 특수작전은 2006년 1월 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번에 개정된 법안이 아니었다면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채널9의 <투데이>에 출연한 앤드류 사이피온 NSW주 부경찰청장도 "검문검색 때문에 도로가 막히고 휴대전화 체크 등으로 많은 불편을 겪었을 시민들이 자진해서 경찰업무에 협조해 줘 감사한다"면서 "특히 소수민족 그룹의 많은 인사들이 소요와 관련한 유익한 비밀정보를 신속하게 경찰에 알려줘 큰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호주인들은 전통적으로 경찰을 비하하는 언행을 해왔지만 이번 18일만은 완전히 그 위세에 압도당한 것처럼 보였다.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면서 몇 번이나 자동차의 트렁크와 짐을 검사 당했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쿠지 비치에 사는 제인이라는 여성은 "버스 안에서 무려 10분 동안이나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를 체크 당하면서 당혹스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무도 항의하지 않아 놀라웠다"고 전했다.

인종폭동 대신 평화집회... "백호주의는 없다"

인종폭동 위기에서 시드니를 구한 것은 물리력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전 세계가 칭송했던 호주의 다민족·다문화주의를 재인식 시킨 평화운동가들의 노력이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18일 시드니와 뉴캐슬에서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민과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시드니 타운홀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12월 11일에 크로눌라 비치에서 인종폭동을 일으킨 5000명의 백인들은 극소수 백인들의 지지를 받을 뿐이다. 백호주의는 더 이상 호주에 없다"고 외쳤다.

a "호주 국기로 가리면 모두 똑같다." 타운홀 인종차별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호주 국기로 가리면 모두 똑같다." 타운홀 인종차별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TNT

버지니아 보스(42·교사)씨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이 일으킨 해프닝이었는데 세계적인 뉴스가 되어서 무척 속상했다.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는 50여 개 국가 출신의 학생들이 함께 공부한다. 그곳엔 인종갈등이라는 말조차 없다"고 전했다.

집회를 마친 군중은 시드니중앙역 옆 벨모어 피크까지 평화의 대행진을 펼쳤다. 피켓을 든 행렬 속에는 시드니의 여름 바닷가를 찾았다가 낭패를 당한 관광객들과 동양계 유학생들도 있었다.

크리스마스 맞은 호주, 인종문제 극복할까?

하지만 호주가 악화일로의 종교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 마침 다가온 크리스마스는 관용과 화해를 강조하는 좋은 구실이 되고 있다.

15일 켄 몰로니 NSW 경찰청장은 "인종폭동으로 잃어 버린 '크리스마스 정신'을 되찾아서 인종적 화합을 이룩하자"고 촉구했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즉각적으로 응답했고, 문화와 스포츠 스타들까지 동참해 화해운동을 벌였다.

존 하워드 호주 총리도 18일자 <선데이 헤럴드>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호주 사회가 근년에 들어서 크리스마스를 상업적 측면으로만 이용할 뿐 예수 탄생에 대한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다"면서 "모슬렘과 유태인 모두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a '캐럴 인 더 파크'에 참가한 중동계 호주인 가족.

'캐럴 인 더 파크'에 참가한 중동계 호주인 가족. ⓒ 윤여문

18일 오후 시드니 라이드에 위치한 공원에서는 맥쿼리 성공회 교회가 주관하는 콘서트 '캐럴 인 더 파크'가 열려 눈길을 끌었다. '하나 되는 크리스천'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캐럴을 부르고 인종폭동을 넘어 인종 화합을 다졌다.

10여 개 종족, 350여 명의 신도들로 구성된 맥쿼리 성공회 교회는 100여 명의 한국인도 활동하고 있으며 교역자도 백인계, 한국계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고 '문명충돌'의 징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 교회의 교인인 마승진(50)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

"크리스마스 정신이야말로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반목과 갈등이 아닌 하모니를 이루는 이 저녁 이 공원에서 누가 문명충돌론을 운운하겠는가? 호주 사람 중의 일부가 빠르게 물질만능주의에 빠지고 크리스마스 정신을 잃어가면서 자기들과 다른 것에 대해 관용의 정신마저 잃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나하고 다른 것은 나쁘거나 틀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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