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렁한 방학식, 시 낭송으로 녹여요

대안학교 원경고, 세 번째 시 낭송의 밤 열어

등록 2005.12.23 14:43수정 2005.12.2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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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영어 선생님드의 영시 낭송

영어 선생님드의 영시 낭송 ⓒ 정일관

경남 합천 시골 들판에 자리 잡고 있는 대안학교 원경고등학교가 12월 22일, 겨울방학을 하루 앞둔 동지 밤에 사제간에 석별의 정을 나누고, 한 해 동안 학교 생활, 기숙사 생활로 애쓴 아이들을 쓰다듬어 주기 위해 선생님들이 마련한 문화 행사인 시 낭송의 밤을 열었습니다.

3년 전, 겨울 방학이 되면 추운 날씨 속에 썰렁한 방학식만 하고는 아이들이 제각각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안쓰러워 선생님들이 무대를 꾸미고 시와 음악과 다과를 준비하여 아이들과 함께 처음 열었던 시 낭송의 밤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애를 쓴 아이들이라고 했습니다만 선생님들이라고 한 해를 살면서 어찌 고달프지 않았겠습니까?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희로애락이 쉼 없이, 문지방 닳듯이 오갔던 대안학교의 한 해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들의 고달픔은 도리어 위무할 기회가 많다 하겠습니다. 서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도 있겠지요.

a 학생 시 낭송-분홍 지우개

학생 시 낭송-분홍 지우개 ⓒ 정일관

그러나 아이들은, 닦달받기 일쑤인 아이들은 자칫 그 힘들고 불안하고 어려움 많은 나날들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그저 성장의 한 과정이라고 치부되기 십상입니다. 때로 어른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 낭송의 밤은 '그 녀석들, 고향 떠나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하며 산다고 얼마나 힘들었을꼬?' 하는 마음으로 방학 전날 밤에 마련한 조촐한 무대였습니다.

"시 낭송 안 해 볼래?"

저는 먼저 행사가 열리기 한 달 전 월요일 1교시, 한 주를 여는 시간에 시 낭송의 밤의 취지를 설명한 후에 시 낭송에 참가할 학생들은 신청하라고 공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시 낭송 중간 중간에 찬조 출연할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있으면 또한 신청하라고 하였습니다.

a 찬조 출연, 오카리나 연주

찬조 출연, 오카리나 연주 ⓒ 정일관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시 낭송에 참가하겠다는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아이씩 만나면서 참가를 권유하였습니다. 그 동안 아이들을 관찰한 결과, 무대에 세우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에게 '시 낭송 안 해 볼래?' 하고 타진을 했죠. 아이들의 반응은 대개 "저는 그런 거 안 해요"와 "시 낭송 어떻게 해요? 저 못 해요" 두 가지였습니다.


이럴 때 아이들을 비난하면서 실망하면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하고는 싶은데 용기가 없는 아이들이 있고, 짐짓 하기 싫지만 떠밀면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는데, 저는 대체로 그런 아이들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 행사에 참가시키는 편이지요. 그렇게 권유하여 받아들인 아이가 있으면 그 이름을 교무실 칠판에 차근차근 적어 저는 마침내 열 명의 학생들을 확보하였습니다.

a 교감 선생님과 여학생의 시 낭송-길 잃은 날의 지혜

교감 선생님과 여학생의 시 낭송-길 잃은 날의 지혜 ⓒ 정일관

사실 시 낭송의 밤과 같은 문화행사에는 교장 선생님이 제일 열성적이었습니다. 낭송할 시를 가지고 와서 누구보다 먼저 시 낭송에 참가할 뜻을 보이고, 두 달 전부터 배워오던 기타로 아이들과 함께 찬조 출연하겠다고 신청하며, 여러 선생님들에게도 수동적인 행사가 되지 않게 이것저것 하겠다고 먼저 나서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저는 업무를 나누어 선생님 몇 분에게 아이들의 먹을거리로 어묵과 떡을 준비하게 하고, 낭송할 시들을 아름다운 배경 그림에 담아 파워포인트로 만들고, 펼침막도 하나 걸어 아름다운 무대를 꾸몄습니다. 3학년 아이에게 들판에 있는 억새를 좀 꺾어오라 했더니, 저수지 옆에 핀 갈대를 잔뜩 베어 와서 함께 웃었는데 갈대를 항아리에 꽂아 무대에 올리니 그것도 운치 있게 한 멋 하였습니다.

a 학생 시 낭송-사랑

학생 시 낭송-사랑 ⓒ 정일관

대나무가 그려진 발을 무대에 걸고 그 앞에 나무 탁자와 토마토 소파를 두었으며, 옆에는 피아노를 설치하였습니다. 꽃과 꽃병을 탁자 위에 올리고, 오래 길러 잎사귀를 치렁치렁 기른 실내 식물인 스킨답서스도 무대에 올려 늘어드렸습니다. 게다가 무대 바닥에 집 거실에서 쓰던 양탄자 두 개를 가져와 깔아 놓으니, 무대는 마치 거실처럼 안온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짧은 시 한 편 읽는 게 왜 그리 어려운지...

거기에다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깜빡이 전구를 감고 이었으며, 풍선 아트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풍선을 예쁘게 불어 곳곳을 장식하였고, 색깔 초에 불을 켜, 아름답고 은은한 연말 분위기도 자아내었습니다.

a 찬조 출연, 알토 색소폰 연주

찬조 출연, 알토 색소폰 연주 ⓒ 정일관

그런 과정에서 저는 시 낭송할 열 명의 아이들을 불러 이루마나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연주곡을 배경음악으로 하여 아이들에게 연습을 시켰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에 많이 쭈뼛쭈뼛하였습니다. 짧은 시 한 편 읽는 것이 무에 어려운가 하고 생각한 아이들도 음률을 타면서 그 시가 가진 느낌과 정서를 또렷하게 전달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고 하였는데요, 저는 어찌 되었던 크고 당당하게 시어들을 잘 씹어서 뱉어내라고 계속 주문하였습니다.

찬조 출연하는 팀들도 많이 늘어나, 교장 선생님과 5명의 아이들이 함께 올라가는 기타 중창과 여선생님 세 분과 여학생 하나가 참여하는 오카리나 연주, 그리고 3명의 학생이 각각 참여하는 피아노 연주와 여학생 두 명의 플루트 연주, 남선생님 두 분의 알토 색소폰 연주, 여선생님 전체 중창과 남선생님 전체 중창 등이 시 낭송의 밤을 더욱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학교가 시끌벅적하였습니다.

a 찬조 출연, 여 선생님들의 중창-아름다운 것들

찬조 출연, 여 선생님들의 중창-아름다운 것들 ⓒ 정일관

아이들과 함께 팥죽을 쑤어 먹은 동짓날 밤, 오후 6시 30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제 3회 원경고등학교 시 낭송의 밤을 열었습니다. 학생회 남녀 부회장 학생들의 사회와 저의 시 해설로 시 낭송의 밤은 진행되었습니다.

시 낭송하는 아이들과 찬조 출연하는 아이들의 손에 땀이 배는 긴장과 시와 음악의 따뜻함이 함께 묻어나는 아름다운 무대였습니다. 학생과 학생, 선생님과 학생 등 2명이 한 조가 되어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와서는 배경 음악에 맞춰 시어를 한 마디 한 마디, 떨면서 목소리가 잠기면서 낭송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평소에 연마하였던 악기를 가슴 두근거리며 연주하였을 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a 학생 시 낭송-용서의 꽃

학생 시 낭송-용서의 꽃 ⓒ 정일관

아이들이 기타를 치면서 산울림의 '개구쟁이'를 부를 때는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이 덩실 덩실 춤을 추었고, 여선생님들과 남선생님들이 노래를 부를 때는 앙코르를 외치며 모두가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시에 담긴 온기, 강추위 녹이다

박노해의 <길 잃은 날의 지혜>나 도종환의 <담쟁이>를 낭송할 때는 희망이 넘쳤고, 안도현의 <분홍 지우개>나 정호승의 <사랑>을 낭송할 때는 감미로웠습니다. 류시화의 <민들레>나 나희덕의 <귀뚜라미>를 낭송할 때는 겸손과 조촐함을 느끼게 하였고, 이해인의 <용서의 꽃>을 낭송할 때는 우리 안에 있는 아픔들이 깨끗함으로 치유되는 것 같았습니다.

a 찬조 출연, 교장 선생님과 여 선생님, 학생의 기타 연주

찬조 출연, 교장 선생님과 여 선생님, 학생의 기타 연주 ⓒ 정일관

강당 바깥에는 겨울이 깊어 찬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시 낭송의 밤이 열리는 강당 안에는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속에는 한 해 동안 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미움과 다툼과 원망도 다 녹아내렸습니다. 매운 손찌검과 훈계와 반항도 다 녹아버렸습니다. 아이들의 이러한 경험은 분명 자신감을 더욱 심어주고 의미 있는 작업에 함께 동참하는 기쁨을 제공할 것입니다.

동짓날 겨울밤은 더욱 깊어갔고, 시 낭송의 밤도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다함께 부르면서 모두 끝이 났습니다. 서로 악수하고 껴안으며 한 해의 고달픔을 위로하고 내년을 격려하였습니다.

한 아이가 다가와 저를 꼭 껴안았습니다. 저와 한 조가 되어 천상병의 시 '귀천'을 낭송한 아이입니다. "많이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였는데, 시 낭송을 한다고는 했지만 참 많이 떨리고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a 무대에 비친 선생님과 학생의 시 낭송 실루엣

무대에 비친 선생님과 학생의 시 낭송 실루엣 ⓒ 정일관

한 여학생도 집에 전화했더니 아빠한테 칭찬받았다면서 좋아하였는데, 역시 시 낭송을 매우 자신 없어 하면서 할까말까 많이 망설였던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도 시 낭송을 끝내고는 "선생님, 저 잘 했죠?" 하면서 매우 뿌듯해 하였고, 저는 "그래, 이것이 너에게 작은 시작이야"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기 위해 1층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식당에 선생님들이 손수 준비한 어묵과 꿀떡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묵을 푸짐하게 먹고 국물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어묵 국물의 따뜻한 김이 식당 유리창에 하얗게 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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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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