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무아의 길

한라산 편지

등록 2005.12.26 09:39수정 2005.12.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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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폭설 내린 한라산 만세동산 풍경. 멀리 보이는 것이 한라산 정상이 백록담 화구벽이다.

폭설 내린 한라산 만세동산 풍경. 멀리 보이는 것이 한라산 정상이 백록담 화구벽이다. ⓒ 오희삼

근 이십여 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야말로 눈폭탄인 셈이지요. 제주도에서 가장 눈이 많은 한라산이 온통 설국(雪國)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 세상이 흰눈으로 덮였습니다. 미처 수확을 끝내지 못한 감귤나무에도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이고, 비닐 하우스마다 무거운 눈덩이의 중압감에 뼈대가 휠 지경입니다.

멀리서 농사짓는 후배는 하우스를 덮은 눈을 털어내느라 장작불도 지피고, 눈삽으로 퍼내기도 합니다. 조금만 내렸으면 좋으련만, 너무 많은 눈이 시름에 잠긴 농부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만 같아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a 눈으로 치장한 한라산의 구상나무.

눈으로 치장한 한라산의 구상나무. ⓒ 오희삼

요즘 한라산에서도 너무 많은 눈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한라산으로 진입하는 횡단도로가 눈으로 들어차서 도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입니다. 평소에는 차량으로 10여 분이면 될 거리를 1시간 이상 걸어서 출근하려니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평소 통행량이 적은 한라산 횡단도로에 제설차가 투입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테지요. 우선은 생활의 불편을 덜어 주는 도로 먼저 제설작업을 해야 할 테니까요.

a 온 가지가 가득한 눈꽃.

온 가지가 가득한 눈꽃. ⓒ 오희삼

이렇게 온통 눈으로 뒤덮인 한라산에 고요와 정적만이 흐르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침묵에 잠기고, 흐르는 시간마저도 눈 속에 잠겨 잠시 멈추어 선 듯 싶습니다. 그 침묵의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만이 산자락을 휘감습니다. 끊길 듯 멈추었다가 긴 호흡 끝에 터져 나온 날숨처럼 바람이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지난 가을 낙엽을 모두 떨구어낸 겨울의 나무들은 온몸을 하얗게 분칠하고 겨울 눈을 키우며 의연히 서 있습니다. 바람의 끝자락으로 희뿌연 안개들이 설원을 휘감고 풍경의 안쪽으로 불어간 바람이 화구벽 바윗골에서 뒤채입니다(너무 흔해서 발길에 걸린다).

a 영주십경의 하나인 영실기암의 겨울 설화.

영주십경의 하나인 영실기암의 겨울 설화. ⓒ 오희삼

하얀 눈으로 치장하고 깊은 겨울잠에 들어선 한라산은 사실 겨울만이 풍기는 멋이 있습니다. 한라산 고원의 선작지왓과 만세동산 일대의 광활한 초원이 모두 하얀 눈에 잠긴 풍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벌판의 구상나무들은 겨울이면 하얀 설의(雪依)을 두르고 서 있고, 검은 현무암벽은 바람과 안개와 눈이 빚어내는 하나의 조각품으로 변하지요. 이런 한라산의 겨울 풍광을 즐기기 위해 해마다 눈이 오고 나면 등산객들이 한라산으로 밀려듭니다.

a 윗세오름산장에 있는 구상나무. 바람과 눈과 안개가 겨울이면 조각품을 빚어낸다.

윗세오름산장에 있는 구상나무. 바람과 눈과 안개가 겨울이면 조각품을 빚어낸다. ⓒ 오희삼

흰 눈으로 가득한 설원을 걸어본 적 있으신지요. 내딛는 순간 허리까지 쑥 허물어져가는 지친 몸을 일으키며 눈길을 헤쳐본 적 있으신지요.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사정없이 흘러내리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한 발자국 옮기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겨울산의 깊은 눈길을 헤쳐나가는 것은 말 그대로 웬만한 노가다 보다 더 힘든 노동이요, 고행의 길입니다. 겨울 산행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가쁜 숨 몰아쉬며 눈길을 헤쳐나가던 아련한 기억속의 숨결과 이마에 흐르는 땀범벅이 그리울 법도 합니다.


a 한라산 선작지왓 벌판의 겨울 풍경. 눈이 2m 이상이나 쌓여서 등산로 표시줄이 거의 눈 속에 잠겨 있다.

한라산 선작지왓 벌판의 겨울 풍경. 눈이 2m 이상이나 쌓여서 등산로 표시줄이 거의 눈 속에 잠겨 있다. ⓒ 오희삼

이렇게 겨울산의 설원 속으로 눈길을 헤쳐나가는 것을 '러셀(Russel)'이라 하지요. 눈이 많은 곳에 사는 '러셀'이란 미국 사람이 고안한 제설차량(러셀차)에서 빌어온 등산 용어입니다.

폭설이 내리고 등산로가 눈에 덮인 후에 처음으로 걸어가는 그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눈 덮인 산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일이지요. 러셀을 해서 눈길을 다져놓지 않으면, 등산로를 찾지 못해 길을 잃기도 하고 평소 10여 분 걸리는 길도 1시간 이상 걸린답니다.

그래서 러셀이 되어 있지 않은 겨울 산길은 대부분 등산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죠. 겨울 산행 경험이 적은 이들은 겨울산이 그저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 많던 눈이 녹아야만 산행을 할 수 있다고 미리 단정해 버립니다.

a 겨울산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눈길을 다지며 길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이것을 러셀이라고 한다.

겨울산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눈길을 다지며 길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이것을 러셀이라고 한다. ⓒ 오희삼

움푹 들어간 한 사람의 발자국에 따르는 이들의 발자국이 더해지고 또 뒤를 이어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디뎌질 때마다 눈길은 단단한 하나의 새로운 길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설원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러셀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드는 일입니다. 허리까지 빠지는 곳에서 한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어려운 법이지요.

그래서 러셀을 할 때는 서너 사람이 번갈아 가며 앞장을 서지요. 그래야겠지요. 앞장 서 걸어본 사람이라면 지금 앞장서서 걷는 사람의 숨소리에서 그 팽팽한 심연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러셀의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의 길이지요. 뒤따르는 이들을 위해 눈을 다지며 나아가는 발걸음은 누군가를 위한 절대희생의 길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아(無我)의 길입니다. 그래야 할 것입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하나 되는 길일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러셀이 주는 마음의 선물일 것입니다.

a 영실 등산로로 접어드는 구상나무 숲속도 온통 눈으로 덮여 있다.

영실 등산로로 접어드는 구상나무 숲속도 온통 눈으로 덮여 있다. ⓒ 오희삼

무릇 겨울산에 갈 때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깊은 눈속을 처음으로 걸어갔던 발자국 위로 흘리고간 땀방울의 마음을 말입니다. 아득한 밤바다에 한 줄기 빛으로 항해하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는 등대지기의 마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누구도 가지 않은 설원을 걸을 땐 힘들고 지치지만 이렇게 누군가 다져놓은 눈길은 그야말로 환희의 길일 것입니다.

비탈진 곳에선 엉덩썰매도 타고 나무마다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설화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함께 간 벗들의 환한 웃음꽃 핀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으면 정말이지 세상의 근심은 모두 사라지고 가슴속에 무엇인가 꽉 들어차는 충만감이 들지요. 보온병에 담아온 모락모락 연기 피어나는 따뜻한 한잔의 커피맛은 또 얼마나 향기로운지, 이런 것이 겨울산행의 매력이 아닐런지요. 그럴 것입니다. 계절마다 산에 오르는 기분이 다르겠지만 유독 겨울산에서 느껴지는 색다른 시공(時空)의 감흥은 다른 계절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a 설화로 가득한 겨울 한라산은 온통 은빛 물결로 출렁거린다.

설화로 가득한 겨울 한라산은 온통 은빛 물결로 출렁거린다. ⓒ 오희삼

겨울이 깊어갑니다. 바다는 사람을 들끓게 하고 산은 사람을 가라앉힌다지요.
순결한 눈으로 가득 덮인 설원 위로 나의 발자국을 찍으며 걷는 길.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 고요한 방에 숨어있을 나를 찾아가는 길고도 먼 길일 것입니다. 어쩌면 겨울이 내안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던져준 탑승권이 아닐런지요. 나를 찾아서 오늘도 진눈깨비 날리는 겨울산을 걸어갑니다.

a 흰 눈으로 덮인 '기다리는 여인'상. 영실등산로 1600고지 벼랑에 있는 바위에 흰 눈이 쌓여 흰 소복을 입은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흰 눈으로 덮인 '기다리는 여인'상. 영실등산로 1600고지 벼랑에 있는 바위에 흰 눈이 쌓여 흰 소복을 입은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 오희삼



덧붙이는 글 | 12월 여행 이벤트 '눈꽃 여행기' 응모.

제주의 인터넷신문 제주소리(jejusori.net)에도 실립니다.

덧붙이는 글 12월 여행 이벤트 '눈꽃 여행기' 응모.

제주의 인터넷신문 제주소리(jejusori.net)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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