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아버린 내 자식(?), 꼭 한 번 보고 싶다

[2005 나만의 특종]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상작, 내 그림 어디로?

등록 2005.12.27 11:27수정 2005.12.2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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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보고 싶은 녀석이 하나 있다. 집 나간 자식, 아니 집 내보낸 자식이 하나 있어 해마다 연말이 오면 더욱 보고 싶다.


"형님, 축하하니더!"
"신문에서 발표된 수상자 명단에서 형님 이름을 보는 순간 손이 다 떨립디다. 하하"
"그래, 고맙다."

1985년 10월 초 동생이, 흔히 국전이라 불리는 제4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화 부분에 내가 입상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축하해 주었다. 그 순간 나 역시 매우 기뻤다. 며칠 후 서면으로 입상통보를 받고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문예진흥원에서 열린 시상식에도 참석했다. 신인화가의 등용문인 국전에 입상함으로써 나는 화가로서 인정을 받은 셈이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주위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a 연하장-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연하장-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정수권

대구에 살던 시절 어느 날, 회사 근처에 화실이 있어 우연히 들렀다가 화실을 운영하는 화가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이 나의 소질을 알아보고 그림을 그릴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당장 화판을 마련하고 화선지와 물감을 장만해서 집에서 두어 작품을 그려봤다.

며칠 후 그 분을 따라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그 모임의 회원 중 한 사람이 앞으로 이 모임에 가입하려면 국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가입 자격을 명시하자고 했다. 모인 사람 중 국전 입상자 몇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 분이 꼭 국전에 입상해야겠다며 바로 준비를 할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경험 삼아 같이 출품을 하자고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분도 벌써 몇 년째 국전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한 번 해봐?'


그때부터 나는 회사에서 퇴근을 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언젠가 감포 앞바다로 여행을 갔다가 녹슨 철조망 너머 오래된 빈 배를 스케치 해둔 것이 있어 소재는 결정 되었지만, 잠깐 어깨 너머로 배운 솜씨를 가지고 이 구상 저 구상을 하다가 출품 날짜가 임박해지자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아졌다.

당시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어야 할 신랑이 아내 대신 엉뚱하게도 커다란 화판과 밤새 씨름을 하고 있으니 새벽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는 아내의 눈길이 고울 리 없었다.


좁은 거실에 밤새도록 어질러놓은 화구며 온 사방으로 튄 물감을 바라보며 '화선지도 제대로 붙일 줄 모르면서 무슨 국전에 출품을 한다고 그러냐'는 아내의 못마땅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혼신의 노력과 모든 정력을 쏟았다. 그리고 기어이 엉뚱한 옥동자(?)를 분만했다.

"내 바가지가 당신의 투지를 불태웠으니 다 내덕인 거 알죠?"

입상 소식에 아내도 기뻐했다. 경주 서라벌 문화회관의 전국 순회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그 그림을 우리 회사의 사무실에 걸었다.

a 경주 서라벌 문화회관 순회 전시회에서

경주 서라벌 문화회관 순회 전시회에서 ⓒ 정수권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 회사의 거래처 김 사장이란 분이 회사를 방문하였다가 나의 그림을 보고 반했다며 당장 구입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의 그림을 계속 사겠다고 했다.

내 그림을 알아주니 고맙기도 하고 커다란 작품을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아 잘 보관해 주실 걸로 생각하고 당시로서는 거금(?)을 받고 팔아버렸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자신이 낸 책이 자식 같듯이, 나 역시 분신 같은 그 그림이 오늘처럼 몹시 추운 날 떠나갔다.

그날, 그림을 판 돈의 일부로 직원들과 한잔 했다. 섭섭해서일까. 대취를 하여 정신을 잃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선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직장이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직장과 낯선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1991년 5월 다시 붓을 잡고 100호짜리 대작을 완성하여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지금까지 걸어두고 있다.

이 작품으로 내가 화가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다. 나와 같이 근무하는 회사 직원이 '어느 가수가 노래 한 곡으로 몇 십 년을 부른다더니 이 그림 하나로 너무 우려먹는 것 아니냐'며 다시 그림을 그리라고 농담을 했다.

a 91-5월-13 (100호) 부일미전 입상작 - 사무실에 걸린 이 그림이 내가 화가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91-5월-13 (100호) 부일미전 입상작 - 사무실에 걸린 이 그림이 내가 화가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 정수권

어느덧 세월이 흘러 올해가 꼭 20년째 되는 해다. 내가 처음 국전에 출품하여 입상작으로 선정되었던 분신과도 같은 그 작품을 딱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

지난 주말에 대구를 다녀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거래처가 있었던 곳에 가봤지만 건물만 남아 있고 회사는 어디로 옮겼는지 주위에 수소문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예전의 전화번호도 바뀌어 있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지만 아직 올해가 며칠 남았으니 이 글을 보고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생각날 때마다 나름대로 여러 번 알아 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빌딩 높다란 로비에 걸려 화려한 조명 아래 뭇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을까? 아니면 이 추운 겨울 너무 커다란 몸집 때문에 따뜻한 거실에 걸리지 못하고 어느 컴컴한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찬바람에 벌벌 떨고 있을까. 꼭 한 번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2005 나만의 특종 응모글

덧붙이는 글 2005 나만의 특종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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