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이 '살려준' 야스쿠니신사

[중-일, 패권경쟁 달아오른다 8] 야스쿠니 참배, 왜 문제가 되는가? 4편

등록 2005.12.27 10:02수정 2005.12.2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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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뿐만 아니라 일제 패망 직후 전승국들의 입장에도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는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서양인들 특히 미국인들의 눈에도 야스쿠니신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식대로라면, 야스쿠니신사는 1945년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과 운명을 함께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야스쿠니신사도 원폭 투하 후의 검은 구름과 함께 사라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스쿠니신사는 패전 이후 사라지기는커녕 총리대신의 '소신에 찬 참배'까지 받으면서 아직도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내뿜고 있다.

그럼, 진작 사라졌어야 할 야스쿠니신사가 여태까지 살아남아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패전국 일본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는 이처럼 여전히 살아 있는데, 항일전쟁(한국의 독립전쟁과 중국의 중일전쟁)의 승자인 한국과 중국은 전후(戰後)에 도리어 민족분단을 겪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동북아에서 발생했다.

제4회 기사에서는 그러한 모순의 원인을 미국의 원폭 투하와 그에 대한 과잉평가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지만, 이번에는 전후 승전국들 간의 내분이라는 관점에서 그 원인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논의를 보다 명확히 진행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미국의 시각에서 승전국들 간의 내분을 조명해 본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승전국들 간의 내분 과정에서 미국의 동북아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또 그러한 변화가 야스쿠니신사의 존속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미국 시각에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핵심적 과제는 '전우'(동맹국)들과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라는 말을 연상시키듯이, 미국은 승리의 성과물을 보다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하여 '전우'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런데 미국은 이 '전우들' 중에서 2가지 부류에 주목하고, 양자(兩者)를 각각 다르게 취급하였다. 가장 강력한 '전우'였던 소련은 최대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약한 또 다른 '전우'들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만들려 하였다.

아래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소련 견제용의 전초기지를 만들려는 미국의 세계전략은 특히 동북아에서 강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항일전쟁의 진정한 승자인 한민족 및 중국 내부에서는 미국의 독점 야욕에 맞선 투쟁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한민족 및 중국 내부의 반미세력은 물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대타'로 일본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럼, 미국이 애초에 소련 견제를 위한 동북아 전초기지로 생각한 곳은 어디였을까? 그곳은 바로 중국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재임 1933~1945년) 때만 해도, 미국이 동북아 전초기지로 생각한 곳은 중국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받을 뿐만 아니라 미국 말을 잘 듣는 국민당 정권이 중국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일본 국왕(소위 '천황')의 항복선언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은 중국 국토의 80% 정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미국은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별다른 염려를 하지 않았으며, 중일전쟁(1937~1945년) 이래 자국의 원조를 받고 있던 중국이 소련 견제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핵심적인 동북아 우방은 중국이었지 일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만약 국민당 정권이 공산당 정권을 제압하고 중국 본토를 차지하였다면, 일본이 미국의 '총애'를 받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또 야스쿠니신사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어떤 사람들은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분명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 사실이지만, 가정이 없으면 역사학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정으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가정을 홀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튼 종전(終戰) 이후의 상황은 미국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일제 패망 후에 중국 내에서 국공내전(國共內戰)이 점화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당 군대가 우세를 잡았더라면 미국이 별다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국공내전의 개시 이후 국민당 정권은 급속히 약화되어 갔다.

기대했던 국민당 정권이 힘을 잃어 가자 미국은 차선책을 선택했다. 그 차선책이라는 것은 일단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립정권을 만들어 정국을 안정시킨 다음에 공산당을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국공 중재에 나섰으며, 그 성과물이 1946년 1월의 정전협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을 미국의 동북아 전초기지로 만든다는 미국의 구상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그런데 1946년 3월 장제스가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미국의 '꿈'은 산산이 깨지기 시작했다. 국민당 군대의 도발로 인해 국공내전은 다시 불붙었으며, 미국의 거듭된 중재도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은 1947년 1월부터 중국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1947년 5월에 공산당은 동북 지방에서 전면적인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1948년 1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하게 되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미국은 즉시 군사고문관을 철수시키고 중국문제에서 발을 뗐다.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을 동북아 전초기지로 활용한다는 미국의 전략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실패로 종결되고 말았다.

공산당이 중국 본토에서 세력을 확대해 가는 동안에 미국은 서서히 중국의 '대타'로 일본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동북아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이기적 목적을 위해 '범인'과 손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가 처음으로 명확하게 공표된 것이 1948년 1월 6일의 '로이얄 성명'이다. 미 육군장관 로이얄이 발표한 이 성명문의 핵심은, '미국이 극동지역에서 전체주의 전쟁의 위협에 대한 방어력을 키우려면 '자주적인 일본'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의 비무장화를 추구하던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종래의 정책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로이얄 성명에 이어 1948년 1월 21일에는 극동위원회(주로 일본을 관리하던 연합국 최고정책기구)에서 미국 대표 맥코이가 "앞으로는 일본경제가 자립할 수 있도록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렇게 선언적 수준에서 표명되던 미국의 대일정책 전환은 1948년 중반이 지나면서 문서화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26일 미 국무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미국의 대일정책에 대한 권고'라는 문서를 제출하였으며, 이는 10월 7일에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이 문서의 채택으로 미국은 새로운 대일정책을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9년 12월 30일에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라는 정책문서를 통해서 미국의 군사적 전초기지로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중국을 대소(對蘇) 전초기지로 삼으려던 애초의 전략을 포기하고 그 '대타'로 일본을 미국의 동북아 전진기지로 삼게 되었다. 미국이 중국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국공내전과 국민당 약화라는 점은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바로 위와 같은 국제전략의 변화 과정 속에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 본질적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야스쿠니신사의 운명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1945년 항복선언 직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을 점령한 미군의 눈에는 야스쿠니신사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비쳐졌다.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미군의 초기 인식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1945년 12월의 소위 '신도지령'(神道指令)이다. 정식 명칭이 '국가신도와 신사신도에 대한 정부의 보증·지원·보전·감독·선전의 금지에 관한 건'인 이 신도지령의 핵심적인 내용은 국가신도를 폐지하고 정교분리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신사신도에 대한 공적인 재정 지원, 신사 연구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공립학교의 존속, 국공립학교에서의 신도 교육, 공인(예컨대 공무원 등) 자격에서 행하는 신사 참배, 국가신도 관련 서적의 배포, 공문서에서 '대동아전쟁'과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사용, 국공립학교에서의 집단적인 신사 참배, 신사 봉납금의 모집, 공공단체에서의 신사 참배, 충혼비나 충령탑의 건립 등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한마디로 미군에 의한 신사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신도지령에 이어 1946년 1월 1일에는 일본 국왕이 자기 자신도 일개 인간에 불과함을 인정하였고(소위 '천황의 인간 선언'), 2월에는 종래의 신사 관련 법령들이 전면 폐지되었다. 이로 인해 국가신도가 공식적으로 소멸하였으며 야스쿠니신사도 일개 종교법인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리고 1947년에는 일반 신사들이 경내 부지를 양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신사와 호국신사만큼은 부지를 양도받지 못했다. 미군 지배 하에서 신사들이 전반적으로 '찬밥' 대우를 받는 상황 속에서 야스쿠니신사는 더 심한 차별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몰락과 추락의 길을 걷던 야스쿠니신사에 반전(反轉)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공내전과 중국 국민당의 몰락이었다. 국민당의 몰락으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환하는 상황에서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미국의 태도도 달라지게 되었다.

야스쿠니신사가 오늘날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야스쿠니신사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대일정책의 변화이며, 그러한 정책적 변화를 가져온 직접적 계기는 바로 국공내전과 국민당의 몰락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공내전이 야스쿠니신사의 부활을 돕는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보다 더 확대된 관점으로 파악해 보면, 일제 패망 이후 한국·중국 등 사실상의 전승국들 내에서 미국의 독점에 대항하는 자주적 투쟁이 전개되고 그 투쟁 과정에서 친미세력이 밀림에 따라, 미국의 동북아전략은 중국을 전초기지로 삼으려던 초기의 전략에서 일본을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전략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도 추락과 몰락의 길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의 운명 전환에 있어서 국공내전과 함께 파악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는 야스쿠니신사가 '화려한 부활'을 하는 데 일종의 '면죄부' 역할을 하였다. 그 점에 관하여는 제9회 기사에서 다루기로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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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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