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전쟁영웅 '김영옥'을 아십니까

[인터뷰] 3개국서 무공훈장... <영웅 김영옥> 쓴 재미저널리스트 한우성씨

등록 2005.12.27 16:39수정 2005.12.2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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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평가받는 김영옥 예비역 미 육군 대령. ⓒ 한우성

몇 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우리나라의 한 출판인이 '김영옥'에 관한 책을 쓰고 있던 재미저널리스트 한우성(49·뉴아메리카 미디어 한국부장)에게 '김영옥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던 한우성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닮았으면 하는 인물이라고 대답했다.

이 일화만으로도 우리에게 매우 낯선 김영옥(86·예비역 미 육군 대령)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 김영옥은 지금 암투병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전화라도 걸려오면 혹시 김영옥의 부음전화가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한다는, 그의 일대기 <영웅 김영옥>(북스토리 펴냄) 출간에 맞춰 한국에 온 지은이 한우성은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서둘러 미국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한우성과의 인터뷰는 지난 12월 22일 오후에 3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전설의 전쟁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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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김영옥>을 쓴 재미저널리스트 한우성. ⓒ 조성일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소설에서나 있을 것 같은 용감하고 비상하며 인간미 넘치는 한 한국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세계를 무대로 기상을 떨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실존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김영옥은 말 그대로 '영웅'이다. 김영옥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9월, 충성심이 의심되는 적대국가 일본계 2세들로 편성된 이른바 '100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상륙작전에 참가, 예상을 깨고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로마 해방의 주역이 된다. 김영옥은 피사도 해방시켰다. 제갈공명을 무색케 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피사를 해방시킨 후 연합군 최초로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 올라간 군인이었다.

당시 그의 전과를 증명하는 일화 한 토막. 김영옥이 로마 점령에 큰 공을 세우자 별이 세 개나 되는 사령관이 그에게 왜 계급이 중위냐고 물었다. 다섯 번이나 진급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는 김영옥의 대답을 들은 사령관은 버럭 화를 내면서 옆에 있던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 그에게 달아주면서 즉석에서 대위로 진급시켰다.

이후 그는 또 독일 치하에 있던 프랑스 브뤼에르 지방을 해방시키는 등 천재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전장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고, 오늘날 미국의 군사 교본을 다시 쓰게 만드는 장본인이 된다.

그의 진가는 예편했다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자원입대하여 대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세운 혁혁한 전공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특히 그는 38선 이남에 형성돼 있던 전선이 60Km나 북상하는 데는 그가 이룬 불패신화에 힘입은 바 크고, 이 사실은 우리 국방부도 인정하는 공식 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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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이 돌본 한국의 전쟁 고아들. ⓒ 한우성


삶의 절반은 봉사영웅

이쯤 되면 그는 '전쟁영웅'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저자 한우성은 김영옥의 삶을 '전쟁영웅'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사실 김영옥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저 역시 그를 2차 대전 전쟁영웅으로만 알았습니다. 그가 한국전쟁에 참가해 그런 전공을 세운 인물인지 몰랐었죠. 그러나 그는 삶의 절반을 사회봉사활동으로 채운 '봉사 영웅'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미 수백 명의 전쟁고아를 돌본 휴머니스트였던 김영옥은 1972년 장군이 되지 못하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가 장군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한편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입은 부상이 너무 심했고, 그로 인한 심한 후유증이라고도 했고, 또 한편에서는 아시아계, 다시 말해 유색인이란 점이 중요한 장애물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한우성은 그 시절 미국에서 김영옥이 대령까지 진급한 것을 두고 아프리카 어느 약소국에서 태어난 흑인이 한국에 살면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한국군에 입대해 대령까지 된 것에 비유했다.

예편 후 비교적 큰 수술만 40여 회를 받아야 했던 김영옥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지자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다케바, 이튼 등 많은 전우들이 산화했을 때 했던 다짐을 떠올렸다.

'만일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내가 속한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칠 것이다.'

군복을 벗기 오래 전부터 일단 군을 떠나면 지난날의 영광을 되돌아보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김영옥은 여성·아동·청소년·노인·장애인·빈민·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이들의 권익을 지키고 신장시키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한국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상징인물

이런 '영웅 김영옥'을 우리와 만날 수 있게 한 것은 아무래도 이 책의 지은이 한우성의 공이 적지 않다. 한우성은 이민 간 지 몇 년 안 된 1992년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한국계에 대한 미국인들의 몰이해도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세계, 특히 미국인들에게 한국인이 누구인지를 이야길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인물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에 모두 뚜렷한 공헌을 하고, 또 한미관계는 물론 나아가 한일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한다는 제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우고 찾아 나섰다가 김영옥을 만났습니다."

1997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김영옥의 남루한 사무실로 찾아간 한우성은 다짜고짜 그의 삶을 책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김영옥은 한사코 거부했다. 1시간이 흘렀지만 김영옥의 마음은 바뀔 것 같지 않았고 한우성은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떠납니다. 김 대령님도 마찬가집니다.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특히 한국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는데,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들을 위해 큰일을 해주십시오."

'마지막'이란 말 앞에 그는 무너졌다. 나이도 나이였고, 건강도 매우 안 좋은 상태였던 것이다.

한우성의 김영옥에 대한 공식적인 취재는 이렇게 시작됐다. 한우성이 나중에 알았지만 여러 전업작가들이 그의 자서전 집필을 제안했고, 이들 제안자들 중에는 일본에서 문학상을 받은 작가를 비롯한 유명작가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그가 일본인들에게서도 존경 받는 '영웅'인 것은 로마 해방에 앞장섰던 '100대대'가 바로 일본계 2세들로 구성됐고, 이들을 지휘한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나 영화 제의만도 50여 차례나 되었다고 한다.

500여 회의 인터뷰와 현장 취재로 쓴 일대기

한우성은 김영옥을 500여 차례나 인터뷰 했고, 프랑스 보쥬산맥을 비롯한 유럽 일대를 포함한 그가 누빈 전장을 직접 답사하며 현장 취재하면서 그의 삶을 오롯이 복원해나갔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른 일 하나가 일대기 집필의 발목을 잡았다.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가 미국 법정에서 일제 강점기 징용 및 성노예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제정했던 것.

한우성은 누구인가

▲ 한우성씨
<영웅 김영옥>을 쓴 기자 한우성은, 군대를 두 번 간 이채로운 경력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일로 여긴다. 전 가족이 이민수속을 밟던 1976년 공군에 입대했다가 예상 외로 이민 수속이 빨라져 두 달간 훈련만 받고 제대했다가 사정이 생겨 이민을 못 가게 되자 국방부로 가서 다시 군에 가게 해달라고 애원해 다시 입대, 3년을 꼬박 채우고 제대했다.

그래서 그는 연세대 불문과 75학번이지만 졸업은 1986년에 하고, 1987년에야 미국에 간다.

미국에서 한국어 번역가로 잠시 있던 그는 인종차별 문제로 상사와 심하게 다투고 그만두던 때 때마침 미주한국일보 기자모집 광고를 보고 응시, 기자가 된다.

2001년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 문제를 다룬 30여회의 시리즈 기사로, 해외로 나간 한국기자상 1호 수상을 비롯 유일한 비영어권 기사로 AP통신 기자상, 미국 내 한국 언론사 소속 기자로는 최초 미국 소수계 기자상을 받았고, 비영어권 언론으로 퓰리처상 1호 후보가 되기도 했다. 그는 또 2003년에는 소수계 언론 소속 기자 1호로 스탠포드대학 Knight Fellow가 되기도 했다.

그는 지금 비영리로 운영되는 미국 소수계 언론 연합인 <뉴아메리카 미디어> 한국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기자로서 이 문제를 취재하며 이런저런 실상을 접하다가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한 한우성은 아예 직접 개입하기로 맘먹고 김영옥을 찾아가 상의한다. 변호인단을 조직해 일본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일대기 집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그의 말을 들은 김영옥은 '내 책보다 그 일이 훨씬 중요하니 집필을 중단하고 그 일에 매진하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그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재판에서 유태인 대리 변호사였던 국제인권변호사협회 수석부회장인 배리 피셔 변호사에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봉선화' '그리운 금강산'을 들려주고 이 노래에 담긴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며 설득,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영입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여 징용피해자 정재원씨가 대표원고로 나서 일본 다이헤요시멘트회사(오노다시멘트의 후신)를 상대로, 한국·중국·대만·필리핀 국적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대표원고로 나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성노예 소송을 각각 제기했다.

결과 징용소송은 패소했고, 성노예 소송은 미국 연방고등법원에서 패소해 지금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중에 있다. 아직 본안소송조차 들어가지 못한 상황인데, 이는 일본의 치밀한 홍보전략 때문이라고 한우성은 생각한다.

"유태인들은 50여 년을 투쟁하여 그나마 해결했습니다. 우리는 극소수를 제외하곤 거의 등한시하죠. 1990년대 들어 정대협이나 나눔의 집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처하고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역사는 건너 뛸 수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실천적 의지가 담긴 적극적인 관심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재로 채택

김영옥은 우리 정부로부터 200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데 이어 지난 9월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암 투병으로 인해 아직 수여식은 가지지 못했다. 자칫 영결식장에서 전달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그의 병세는 위독하다.

하와이로 밀항한 사탕수수밭 노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초기 이민세대의 아들로 태어난 김영옥은 이미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을 비롯 프랑스에서 십자무공훈장(2등)에 이어 올 2월에 최고무공훈장인 레종도뇌르를 받은 바 있어, 우리나라까지 포함하면 3개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은 인물이 됐다.

"은성 무공훈장을 준 미국도 언젠가 최고무공훈장을 서훈하리라 생각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 아닙니까? 아마 맥아더 정도만 이 정도 대접을 받았을 겁니다."

그러면서 한우성은 얘기가 나온 김에 맥아더에 대한 입장도 피력한다. 맥아더는 공과가 뚜렷한 인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것과 같은 공도 분명히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한우성은 중공군 참전 정보를 가볍게 여긴 것과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한 아몬드 장군이 맥아더의 '페어헤어드 보이'(fair-haired Boy : 미군들 사이에서 각별히 아끼고 보직관리까지 해주며 아낌을 받는 사람을 말함)였는데, 이로 인한 작전 실패 등 전쟁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우성은 김영옥의 삶이 자칫 무공훈장에만 초점이 맞춰져 단순히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훈장을 달고 있는 어느 전쟁 영웅만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김영옥의 소박한 희망을 전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내 이야기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면서 한우성은 진정한 영웅인 그의 일대기를 담은 이 책 <영웅 김영옥>이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교재로 채택했다면서 그가 한국인인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다는 말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영웅 김영옥

한우성 지음,
북스토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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