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복무가 국방의 구멍이 되진 않는다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질문 여섯 가지에 답한다 ②

등록 2006.01.01 12:20수정 2006.01.0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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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각종 포털 사이트와 신문, 방송 사이트에서는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여론조사가 한창이다. 무죄판결이나 헌재판결, 대법원판결 때에도 이렇게 많은 여론조사가 동시 다발적으로 열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사건들은 '이슈화'였던 반면, 금번 인권위의 권고는 '제도화'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받아들이는 무게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이제는 더 이상 비생산적인 논쟁은 그만하고 부당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젊은이들을 사회에 내놓아 그들도 넓은 의미의 국방에 힘쓰고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해줘야 할 때다.

지난 기사에서는 거친 반론에도 불구하고 '양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국방'이란 병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대체복무제도는 선진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국방의 한 부면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번 기사에서는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네가지 대표적인 질문을 계속 다뤄보도록 한다.

(1) 왜 '양심'인가?
(2) 양심적 병역 거부는 의무와 희생을 거부하는 무임승차 행위인가?
(3) 대체복무제도는 기피자를 양산하는 국방의 구멍이 될 것인가?
(4) 분단의 상황에서 시기상조인가?
(5) 대체복무제도가 생긴다면 대상자의 '양심'을 심사할 수 있을 것인가?
(6)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인가?


3. 대체복무제도는 기피자를 양산하는 국방의 구멍이 될 것인가?

이것은 형평성과 악용우려에 대한 질문이다. 좀 더 노골적인 표현을 빌려보자면, "양심적 병역 거부를 허용하면 누가 군대 가려고 하겠는가? 너도 나도 다 거부하지. 그러면 이 나라는 누가 지키나?" 라는 질문이나 다름없다.

이 질문과 유사한 질문을 만들어 보자. "공익근무 허용하면 누가 군대 가려고 하겠는가? 너도 나도 다 공익근무하려고 하지. 그러면 이 나라는 누가 지키나?" 하지만, 현실이 그러한가? 병무청 홍보에 따르면 현행 대체복무제도는 '본인의 자율적 의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열린 제도다. 실제로 현역 대상자든, 공익 근무 대상자든 기능사보부터 기사 자격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자격증을 취득하면 대체복무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출퇴근이고 월급도 받는다.

그런데 왜 이 합법적인 제도로 사람들이 대거 몰리고 있지 않은가? 현역에 비해 근무기간도 훨씬 길고, 사회에 나와서도 현역필에 비해 여러모로 불이익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차라리 질병을 치료하고 재검을 받더라도 현역입대를 하겠다는 것이 병무청에서 조사한 요즘 젊은이들의 전반적 추세다.

이쯤 되면 답은 자명해진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도 공익근무처럼만 만든다면 악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공익근무보다 더 어렵게 만들거나 더 길게 만들면 된다. 위험을 무릅쓰고 악용하려면, 성공했을 때 무언가 이익이 있어야 하는데 기껏 힘들게 심사를 통과한 결과 더 긴 기간 더 힘든 일을 해야 하고, 그 흔한 "내가 군시절에는~"하는 무용담도 만들어지지 않는 전적을 갖게 된다면 누가 그것을 선택하겠는가.

물론, 대체복무제도를 시행했던 그 어떤 나라에서도 국가가 정책적으로 사회봉사자를 늘리려고 유도하지 않은 이상 병역 거부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기록은 없다. 타이완이 대표적인 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타이완에서는 대체복무자 인원할당이 있지만 일이 힘들고 기간이 길어 신청자가 정원에 미달하자 기간을 줄이는 고육지책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미 한국에서도 대체복무제 쿼터제가 제안된바 있다)

안타까운 것은, 군대를 이다지도 기피하고 싶은 곳이 되게 방치한 국방부와 정부에게 책임을 묻는 말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어째서 이다지도 유순하단 말인가? 군대내 인권, 희생을 강요당한 젊은이들의 권리와 최소한의 자유를 위해 예비역들은 도대체 왜 한마디도 하지 않는가? 채찍으로 실컷 얻어맞으면서, 때리는 사람에겐 한마디도 못하다가 채찍 대신 몽둥이로 맞겠다고 한 사람에게 분노의 화살을 쏟아 붓는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4. 분단의 상황에서 시기상조인가?

악용에 대한 우려가 없다면 '시기상조'도 무의미한 말이 된다. 분단의 상황에서 국방력이 줄어드는 것을 허용하기엔 이르다는 말이 아닌가? 그 중엔 '병역의무에 대한 긴장된 의무감을 풀어줄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악용될 우려가 없고, 감옥에 가는 바람에 국방의 의무를 할 수 없던 사람들이 대체복무로 사회에 기여하게 된다면 가용 국방인원이 늘어나는 것이므로 '시기상조'라는 말은 깊이 생각하지 않은 말이 된다.

그러나, 시기상조라는 말은 네티즌들의 생각뿐 아니라, 한나라당의 대변인실과 당대표에게서 나온 말의 기조이기도 하다. 아무리 보수당이라고는 하지만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가 심각하게 경직되어 있다는 단적인 증거다. 지금도 감옥에 들어가고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시급한 문제에 대해 어찌도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시기상조라는 말 앞에는 항상 "인권문제로서 해결해야 하긴 하지만"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범죄자는 아니고 국제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기는 하지만 분단의 현실 때문에 악용의 우려가 없다 하더라도 감옥에 계속 들어가 줘야 하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폭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데, "당신의 목숨을 구해주긴 해야 하겠는데, 아직 당신을 위한 마른 옷이 없고 나눠먹을 밥도 충분치 않으니 계속 물속에 있어줘야겠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일제 시대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계속해서 처벌받아 왔다. 언제쯤 되어야 적정시기가 될까? 해상, 육로 관광은 물론이고 남한의 근로자가 북한에 가서 음주운전을 하는 이 시대에도 시기상조라면 통일이 된 다음에도 시기상조라고 말하지 말란 법이 있을까? 병역거부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때 (가령 모병제 도입)까지 기다려야 할까? 내가 더 이상 배불러 먹을 수 없고 다음에 먹을 것까지 충분히 비축된 다음에야 물 한모금 줄 수 있다는 태도가 과연 다수자가 소수자의 인권을 대하는 바른 태도란 말인가?

타이완은 핵무기를 갖춘 거대 중국과 첨예하게 대치하는 시기에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했다. 영국은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했다. 대체복무제도 도입의 적정 시기는 안정이 담보된 다음이 아니라 병역 거부자가 발생한 바로 그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양심적 거부 시리즈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다소 장난스런 예측이긴 하지만 그것에 중량감을 두는 분들도 적잖은 것 같다. 실제로 국회 공청회에서 중앙대 제모 교수께서는 의원들에게 양심적 납세 거부가 이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 한 의원이 교수에게 반문했다.

의원 : "양심적 병역 거부를 허용한 나라에서 양심적 납세거부 운동이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까?"
교수 : "보고된 바 없습니다."

5. 대체복무제도가 생긴다면 대상자의 '양심'을 심사할 수 있을 것인가?

군 면제를 위해 정신병 여부를 판단할 때 대상자의 정신세계를 모두 심시하는가? 군복무에 적합한지 알기 위해 해당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정밀 검사하는가? 그렇지 않다. 필요한 부분만을 검사한다. 그런데 병역 거부자에 대해서는 유독 그의 '양심'을 모두 심사해야 하는 부담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복무제도'를 악용을 할 매력이 없는 것으로 만든다면 '심사'의 부담도 대폭 줄어든다. 그 사람이 평화 신념에 해당하는 행동을 해 왔는지 전력을 살펴보고 군복무보다 더 긴 기간 더 힘들더라도 사회를 위한 다른 일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만 살펴본다면 다른 판단은 필요치 않다. 즉, 필요한 사안만을 검사할 뿐 한 개인의 우주와도 같은 사고 방식과 숨겨진 품성, 양심, 본심, 의도 등을 모두 알아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남부지법의 이정렬 판사는 독일의 판별법을 기준으로 간략하나마 심사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피고 중 3명에게는 무죄를, 1명인 조모씨(23)에게는 3년형을 선고하는 일이 있었다. 판결문에서 이정렬 판사는 객관적 소명이 유첨된다면 심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소상히 밝힌바 있다.

(6)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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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12월 12일 국가인권위에서 열린 공청회 모습. ⓒ 김재현

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유독 한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만 실천해 왔는지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물어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성 종교들에서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유달리 독특한 교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성서에 언명된 평화와 이웃사랑에 근거한 행동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같은 성서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기성 종교에서 그것을 실천해 오지 못한 것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병역 거부의 99%가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한국 사회는 대단히 독특한 경우에 속한다.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단체인 '한국 기독교 총연맹'(이하 한기총)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종교 단체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고 지지한다. 지난 12월12일에도 한국 종교와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종교를 불문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는 지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재확인된바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이 병역 거부자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왜 그들에게 특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국방의 의무에서 면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군복무보다 짧거나 쉬운 것도 아닌데 단지 감옥에서 나오니까 그것이 특혜인가? 도대체 우리 사회는 왜 여호와의 증인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이다지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들은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인가?

특혜라는 표현은 이단논쟁의 산물이다. 오만한 기독교단체가 여호와의 증인을 전 국민의 이단으로 규정하고 신도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한 말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특혜'라는 주장이었다. 솔직히 이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다. 대체복무를 허용한다고 해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늘어난다는 말도 근거 없는 (전 세계적인 전례가 없는) 말일뿐더러 신도수의 이동이 우려되어 인권정책을 후퇴시켜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가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최소한의 사항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사상과 가치관을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의 것을 존중하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서 조화를 이루어 나가려고 노력한다. 아버지는 밖에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벌고 어머니는 부지런히 집안을 돌보며 아이들은 각자의 몫을 성실히 다해서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과 같다. 서로 자신의 역할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행복에서 멀어지게 된다. 부디 이 사회가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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