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공부 좀 하게 해 주세요"

[해외리포트] 오스트리아 '열린 대학'에선 무슨 일이?

등록 2006.01.03 10:14수정 2006.01.0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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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국립대학교의 극장학과에 재학 중인 22살의 크리스틴은 지난 크리스마스 휴가 때 가족들이 있는 고향 독일로 돌아갔다.

그녀는 1년에 5~6번씩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오간다. 두 국가를 왕복하는 교통 및 항공비가 만만치 않지만, 독일인인 그녀는 기꺼이 오스트리아에서의 대학교육을 선택했다. "50%는 성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50%는 대학입학과정이 쉬웠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한국과 달리 대학입학시험이 존재하지 않는 독일에서는 고등학교(김나지움) 졸업시험인 아비투어(Abitur)의 성적이 대학입학을 좌우한다. 아비투어 성적과 관계없이 입학할 수 있는 학과도 많지만, 젊은 세대들이 선호하는 인기학과나 의대, 약대 등은 입학생수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아비투어 성적이 매우 중요하다.

독일 북부의 농촌 출신인 크리스틴은 대도시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아비투어 성적으로는 베를린 훔볼트대학교나 프라이에대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물론 다른 소도시의 대학에 입학할 성적은 되었지만 입학을 원하는 모든 대학에 성적표 등을 첨부해 입학원서를 일일이 우편을 보내는 대신 그녀가 택한 곳은 옆 국가인 오스트리아였다.

a 비엔나국립대학교 본관.

비엔나국립대학교 본관. ⓒ 배을선

비엔나국립대학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의 중심가에 위치해 있으며, 인터넷으로 입학원서를 작성하면 입학이 가능하다. 아비투어 성적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성적 때문에 독일의 원하는 대학교와 학과에 진학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터넷 액세스만으로 성적에 관계없이 이웃나라 대도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건 한마디로 희망이다"면서 "인터넷 접수를 마친 후 비엔나에 와서 학생등록을 한 날로 바로 극장학과 학생이 되었다"고 말했다.

소수 엘리트 대학에서 '열린 대학'으로


크리스틴처럼 독일 국적을 가진 오스트리아의 대학생은 2005년 현재 전체 대학생 중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대학이 원래부터 낮은 대학문턱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중 한 곳인 비엔나국립대학교를 비롯, 모든 오스트리아의 대학교는 창립 이후 줄곧 오스트리아의 귀족들과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아카데미였다. 서민들에게는 언제나 '닫힌' 곳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오스트리아의 대학은 예수회원들과 유대인들에게도 학문의 기회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1895년에는 일반 서민들에게도 대학 강의를 시작해 최고 고등교육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이어 1897년에는 여성에게도 대학입학 기회를 부여하면서 점차 '열린 대학'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 이후 "배우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교육은 열려있어야 한다"는 모토 아래 오스트리아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고등학교(김나지움) 졸업시험인 마투라(Matura)에만 합격하면 성적과 관계없이 대학교의 모든 학과에 진학할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의대, 약대 등의 몇몇 학과가 '라틴어' 시험을 조건으로 달거나 '라틴어'를 배운 학생들에게만 입학을 허용한 정도다.

유학생 급증, 카오스에 휩싸인 '열린 대학'

대학 문턱이 낮아지자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외국인 유학생들의 수가 점차 늘어났다.

원래 오스트리아 대학당국과 정부는 외국인 학생들의 대학입학에 한해서만 간단한 입학 제한을 두었다. 의대와 약대, 물리·화학·생물학과, 졸업 후 정신과 상담치료가 가능한 심리학과, 상대 등 인기 학과에 입학하려는 외국인 학생의 경우 '출신국가 대학의 동일학과에 입학했다'는 증거서류를 제출하게 한 것.

이는 오스트리아가 대학에 진학할 실력을 갖춘 우수한 외국학생들만 유학생들로 선별하겠다는 뜻이자 오스트리아 학생들에게 먼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열린 대학'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a 현대식 강의실. 'All About Alfred'라는 히치콕에 관한 영화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1시간 전부터 복도에서 줄을 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

현대식 강의실. 'All About Alfred'라는 히치콕에 관한 영화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1시간 전부터 복도에서 줄을 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 ⓒ 배을선

그러나 '열린 대학'의 유일한 '애국적 보루'는 지난 여름 힘없이 무너졌다. 유럽법원(EuGH)이 2005년 7월 "오스트리아가 외국학생들에 한해 증거서류를 제출하게 하는 등 입학 제한을 두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으며 다른 유럽연합 국가 출신 학생들을 배제하는 행위이자 인종차별에 해당한다"고 위헌판결을 내린 것.

유럽법원의 위헌판결이 있자마자 이웃국가인 독일유학생들의 대학입학률이 급증했다. 이어 7·8월의 여름휴가 때문에 독일학생들에 비해 입학서류를 늦게 접수시킨 오스트리아 학생들이 의대나 수의대 등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결국 오스트리아 대학당국은 인기학과에 한해 대학입학시험제도를 신설했지만 무시험으로 입학해온 오스트리아 학생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문턱만 낮췄지, 이게 대학인가"

a 오스트리아 대학교별 교수 1명당 학생들의 수. 교수들의 학생 지도관리는 음대 등 몇군데를 제외하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스트리아 대학교별 교수 1명당 학생들의 수. 교수들의 학생 지도관리는 음대 등 몇군데를 제외하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비엔나국립상대의 교수 1명당 학생수(2004년 겨울학기 기준)는 288.9명, 비엔나국립인문대의 교수 1명당 학생수는 208.5명으로 상상을 초월한다. 그나마 비엔나국립음대와 그라츠예술대의 경우 11.6명으로 가장 적절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학생수가 이렇게 많다보니 강의시간 1~2시간 전부터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복도에서 줄을 섰다가 계단이나 바닥에 앉아 강의를 듣다가 자리를 뜨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강의신청을 했다가 취소를 반복하는 학생들도 증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 게러 교육부장관은 "독일유학생이 너무 많아서 생긴 일이니 독일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고 입장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비판 끝에 몇 달 뒤 "대학 당국이 스스로 처리해야 할 문제"라며 꽁무니를 뺐다.

공영방송인 ORF의 공개포럼에 참석한 교육전문가들은 "유학생이 원인이 아니라 열린 대학의 문제점이 곪아터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학보조금을 늘리고 교수 1명당 학생수를 줄이는 것과 더불어 강의실 등의 시설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것.

실제 독일학생들을 비롯해 외국인 유학생들의 수는 오스트리아 전체 대학생수의 30%를 넘지 않는다. 오히려 나머지 70%의 오스트리아 대학생들이 모두 대학에 입학할 만큼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을 뿐더러 대학의 자율적인 교육시스템이 학생들에게 더 열심히 공부할만한 동기를 부여하지 않아 자퇴학생이 증가하는 것이라는 게 교육전문가들의 전체적인 평가다.

a '올 어바웃 알프레드' 강의 모습, 바닥에 앉아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가득하다.

'올 어바웃 알프레드' 강의 모습, 바닥에 앉아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가득하다. ⓒ Koeppl

일례로 극장·영화·미디어학부의 경우 매년 700~800여 명의 학생들이 입학해 첫 학기를 시작하지만 졸업생수는 50여 명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650~750여 명의 학생들은 자퇴하거나 학부를 바꾸거나 정규기간인 4년을 넘게 공부한다는 것.

오스트리아의 대학교에는 인기학과 및 음대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학의 학과에 입학정원제한제도가 존재하지 않고 대학시설은 그 학생들을 모두 유치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이러한 대학정책은 학생들의 학문적 성취도 및 열정을 저하시켜 많은 자퇴학생 수를 초래하지만 이것을 막기 위한 대학이나 교수들의 '상담'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학생들의 불만은 시위로 터져 나왔다. 11월 말, 2천여 명의 학생들이 비엔나 중심가에서 교육부장관 사퇴 및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비엔나에서 시작된 학생시위는 그라츠와 린즈, 인스부르크 등으로 번졌고 언론은 약 4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유학생들도 후회막급 "졸업은 독일서 하고 싶다"

a 11월 말 있었던 학생들의 시위기사가 실린 <데어 슈탄다드>. "교수는 더 이상 교수가 아니다"라고 쓰여진 피켓에 실린 사진은 교육부장관의 얼굴.

11월 말 있었던 학생들의 시위기사가 실린 <데어 슈탄다드>. "교수는 더 이상 교수가 아니다"라고 쓰여진 피켓에 실린 사진은 교육부장관의 얼굴.

유학생들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 독일 바이에른 뮌헨에서 유학 온 한나(20)는 영화공부를 하고 싶어 작년 비엔나국립대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기만 마치고 자퇴했다. "대학공부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크리스틴 역시 "교환학생과정을 통해 졸업은 독일이나 영국 등에서 하고 싶다"며 "희망을 찾아 온 오스트리아대학에서 오히려 공부할 의욕만 저하되었다"고 고백했다. 올해 입학시험에 합격해 심리학과에 진학하게 된 카트리나(23)는 "오스트리아의 열린 대학시스템 자체에 조직상 허술한 문제점이 많다"며 "오스트리아 교육환경은 다른 유럽국가나 선진국에 비해 떨어진다"고 진단했다.

비엔나국립상대에 다니는 중국출신 유학생 류는 "대학에 벌써 3학기째 다니고 있지만 아직 한번도 시험을 보지 않았다"며 "독일어가 어렵기도 하지만 학교시스템에 강제성이 없으니 공부를 안 하고 시험도 자꾸 미루게 되었다"고 말한다.

오스트리아 대학교는 한국과 달리 중간고사 없이 기말고사만 보며 3번의 시험기회가 주어진다. 몇몇 강의는 학기 초에 등록을 할 필요 없이 시험을 보느냐 안 보느냐에 따라 강의등록 여부가 결정된다.

따라서 독일어를 잘 하지 못하는 아시아 출신 유학생들은 시험연기가 잦아 10년간 대학을 다니는 일도 흔하다. 그런데도 교수나 조교수들이 학생들을 지도하거나 관리하지 않는다. 열린 교육이기 때문에 모든 걸 학생들의 자율에 맡긴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언론들은 '대학교 비극', 혹은 이와 비슷한 제목의 특별란을 구성해 이웃나라들의 대학제도를 꼼꼼히 비교하며 대학개선을 위한 방안을 찾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은 아직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학생들은 대학교가 최소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공산주의와 평등주의로 그 문을 활짝 연 오스트리아대학교의 열린 교육 시스템은 아무런 변화와 개선 없이 또 한 해를 맞고 있다. 정권을 잡고 있는 보수당의 볼프강 쉬셀 국무총리는 다음 선거에서 교육부장관을 새로 신임하겠다고 밝혔다. 새 교육부장관이 열린 대학으로서의 장점은 살리면서 경쟁력 있는 학생들을 배출할 교육시스템을 정비할 수 있을지 자못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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