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에너지 시위에 유럽 경악... "내 힘 봤지?"

[분석] 우크라이나 가스공급 중단 파문... 서방 "불량배 같은 행동"

등록 2006.01.03 15:19수정 2006.01.0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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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월 3일 데일리 텔레그라프 오피니언란에 실린 카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가스를 무기로 유럽을 위협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1월 3일 데일리 텔레그라프 오피니언란에 실린 카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가스를 무기로 유럽을 위협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서방은 러시아의 불량배같은 행동에 대해 저항해야한다 … 현재 가즈프롬(러시아의 국영 가스회사)이 벌이고 있는 깡패짓과 협박은 옛 소련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래프> 오피니언란에 실린 기사)

"2006년에 새로 발생한 일은 러시아가 세계 위협 세력의 지도에 재 등장했다는 것이다. 단지 수단이 변했다. 핵무기와 국제공산주의운동 대신에 이제는 가스관이다" (이탈리아 일간지 <라 스탐파>)

지난 1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가스 공급을 중단하자 일부 서유럽 언론들이 보인 반응이다. 마치 과거 냉전시절 소련에 대한 비난을 연상시킨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모두 맹추위 때문에 실패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러시아의 공세(?)는 한겨울에, 그것도 가장 핵심 난방 연료인 가스를 사용해 이뤄졌다.

러시아의 국영 가스회사인 가즈프롬은 3일 밤(현지 시각)까지 우크라이나 영토를 통과하는 가스관을 통해 유럽에 공급하는 천연가스 양을 애초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2일 밝혔다. 그러나 유럽의 우려는 식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미래의 어느 날 러시아가 갑자기 가스 공급을 끊어버리면 유럽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현재 유럽은 한 해 가스 소비량의 25% 정도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이 공급량의 80%가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을 통해 이뤄진다. 유럽의 대 러시아 가스 의존도는 나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슬로바키아는 100%, 불가리아는 94%, 그리스 92%, 체코 73%, 헝가리 72%, 폴란드 60% 선이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도 30% 안팎의 가스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한다.


AP통신은 3일 "가스 분쟁이 러시아에 대해 의구심을 키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전문가인 필립 핸슨은 "러시아가 이런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예의바른 이웃으로서의 러시아의 이미지에 정치적 타격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교롭게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한 날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G8 정상회담의 순번제 의장을 맡은 날이었다. G8의 올해 주요 화제는 바로 에너지 안보 문제다.


우크라이나의 일탈에 러시아 분노

a 알렉산드르 아나넨코프 가즈프롬 부사장.

알렉산드르 아나넨코프 가즈프롬 부사장. ⓒ 가즈프롬 홈페이지

에너지 문제가 초래한 분쟁들

지난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도 일부 원인은 에너지 문제에 있었다. 1937년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다. 이를 비판하던 미국은 일본에 대한 원유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양국의 갈등은 결국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다.

1953년 이란에서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모하메드 모사데그 정부가 쿠데타로 전복됐다. 민족주의 성향인 모사데그 정부의 석유산업 국유화 조치에 경악한 미국과 영국이 쿠데타를 일으켜 팔레비 국왕을 옹립했다.

수년전 공개된 영국의 외교문서에 의하면 지난 1973년 중동전 때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자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부다비 등의 유전 지역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었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패권다툼도 에너지 문제 때문에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현재 중국은 한해 소비하는 원유의 50%를 수입한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랍 산유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것이 미중간의 갈등을 깊게 만들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 김태경 기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가스의 공급가를 1000㎥당 50달러에서 230달러로 갑자기 올린 것이 이번 분쟁의 원인이다. 우크라이나는 한 해 소비 가스의 3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가 유럽연합에 공급하는 가격은 1000㎥당 240달러다.

그러나 러시아는 발트 3국에는 120달러, 벨로루시는 47달러,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에는 각각 110달러에 제공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이면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갈등, 그리고 이런 우크라이나를 러시아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공을 들였던 서방의 전략이 자리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한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에 있다.

흑해 연안에 있는 세바스토폴 항은 수심이 깊어 러시아 흑해 함대의 모항이다. 크림 반도도 원래는 러시아 땅인데 옛 소연방 시절 행정 편의상 우크라이나에 편입시켰다가 연방이 해체되면서 그냥 남의 땅으로 넘어갔다.

지난해 11월 오렌지 혁명으로 친서방 반 러시아 정책의 빅토르 유셴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서방은 유센코를, 러시아는 친 러 성향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유셴코는 집권 뒤 유럽연합(EU)과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 특히 냉전 시절 소련을 겨냥해 만들어진 나토에 우크라이나가 가입하는 것은 러시아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유셴코는 매년 1억 달러를 받고 2017년까지 러시아가 사용하도록 한 세바스토폴 항의 임대료도 크게 올릴 계획이었다.

지난 1997년 그루지야·우크라이나·아제르바이잔·몰도바 등은 지역 협력체를 출범시켰다. 1999년 우즈베키스탄이 가입해 각국의 머릿글자를 따 'GUUUAM'으로 불린 이 조직은 친 서방·반 러시아 경향을 보였다. (우즈베키스탄은 지난해 5월 미국이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자 탈퇴했다)

출범 뒤 지지부진하던 구암은 지난 2003~2004년 시민 혁명으로 등장한 미하일 사카쉬빌리 그루지야 대통령,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블라디미르 보로닌 몰도바 대통령 등이 세력을 재규합하면서 탈러시아 경향을 노골화했다.

에너지를 통한 러시아 힘의 과시

a 지난해 12월 9일 시작된 러시아 가즈프롬과 독일 바스프사 간의 북유럽 가스관 구축 사업 사진.

지난해 12월 9일 시작된 러시아 가즈프롬과 독일 바스프사 간의 북유럽 가스관 구축 사업 사진. ⓒ 가즈프롬 홈페이지

전문가들은 서방 언론들의 격한 반응에 대해 "에너지 냉전의 시작이라거나 가스를 무기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과하다"는 입장이다.

외교안보연구원 고재남 교수는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국제사회에서 영향력 행사 수단이 군수물자·항공우주 산업·에너지 쪽"이라며 "이런 것들을 이용해 러시아의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에 서방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자신들 쪽으로 끌어왔다"며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우크라이나를 견제하는 수단이 첫째는 에너지이고 두번째는 크림 자치공화국의 독립 등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분리 독립 운동 고무 등"이라고 말했다.

고 교수는 그러나 이번 사태가 끝까지 갈 것으로는 보지는 않았다. 두 나라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유럽의 에너지 우려에 대해 그는 "러시아가 가스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유럽인들의 인식은 좀 과한 표현"며 "에너지를 수출해 경화를 획득하는 것이 러시아의 주요 목적인데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을 것 아니냐"고 밝혔다.

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의 황성우 교수는 "이번 조치는 소 연방 해체 직후때처럼 러시아가 호락호락한 국가는 아니라는 점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다"며 "유럽 지역에서 러시아의 헤게모니를 찾고 자존심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러시아가 유럽을 견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원유와 가스"라며 "2000년을 기점으로 국제 유가가 오르면서 러시아 경제는 활황이고, 푸틴이라는 강력한 지도자의 출연, 여기에 자존심이 아주 강한 러시아 국민성이 결합하면서 과거 1등 국민의 영광을 재연하고 싶은 생각일 것"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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