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뱃돈? 그게 다 빚이야 빚!"

마음 빚 갚아가며, 얹어가며 사는 게 사람살이

등록 2006.01.04 17:33수정 2006.01.0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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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3일) 오후, 매년 정월초 신년인사를 가는 이소노(磯野)씨 집엘 다녀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갔더니 이소노씨 부인이 조그만 '오토시타마(お年玉:세뱃돈)' 봉투에 세뱃돈을 담아 아이들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a 오토시타마 (お年玉 세뱃돈)

오토시타마 (お年玉 세뱃돈) ⓒ 임미옥

으레 받을 것을 예상했던지라 가기 전부터 우린 아이들에게 단단히 인사 연습을 시켰다.

"너희 말이야 '오토시타마' 받으면 고개만 까딱 인사 하지 말고 발음도 확실하게 큰소리로 또박 또박.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하고 제대로 인사해야 돼. 알았지?"

조그만 꼬맹이도 아니고 이젠 덩치가 엄마보다 더 커진 아이들인지라 밖에서의 인사 예절에 부쩍 더 압력을 가하는 요즘이었다. 아이들은 단단히 주의를 들어서인지 1년 만의 방문이 되는 이소노씨 댁 현관에서부터 제대로 어른스럽게 인사를 했다.

"아케마시떼 오메데토 고자이마스!"(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고레와~ 후타리또모 오오키꾸낫타나~ 아케마시떼 오메데토~~"(이야~ 둘 다 많이 컸는 걸~ 새해 복 많이 받고~)


'오세치(おせち:일본 정월 요리)'가 차려진 '코타츠(コタツ:난로와 이불이 붙어 있는 일본전통의 난방기구 겸 밥상)'에 둘러앉아 알록달록 색깔도 예쁜 오세치와 스시(すし:초밥)를 먹으며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었다.

1년 사이에 아이들이 부쩍 큰 만큼 남편과 나, 이소노씨 부부는 부쩍 나이가 든 듯 보였다. 염색약이 많이 빠진 남편의 흰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어선가 이소노씨가 그간의 안부를 물어왔다.


"코노고로와 오겡코와 다이죠부? 카오이로와 손나니 와루쿠 미에나이케도 카나리 시라가가 미에테루네~"(요즘 건강은 괜찮구? 얼굴색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는데 꽤 흰머리가 보이네~)

"아, 다이죠부데스. 시라가와 오야유즈리난데… 하하하."(아, 괜찮습니다. 흰머리는 유전이라서요. 하하하)

a 일본 정월음식인 오세치와 초밥이 있는 상차림

일본 정월음식인 오세치와 초밥이 있는 상차림 ⓒ 임미옥

워낙 음식솜씨 야무진 이소노씨 부인의 맛있는 오세치 요리를 먹으며 오랜만에 만나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잠시 설거지를 거든 후, 술이 얼큰하게 취한 남편과 밤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학원숙제 때문에 도중에 먼저 집에 돌아와 있던 아이들은 거실에 상을 펴고 이소노씨 부인이 간식으로 싸준 오세치, 과자 등을 먹으며 숙제들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던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희, 세뱃돈 얼마 받았니? 봉투에 얼마 들어 있던?"

봉투가 건네지는 것만 봤지 얼마가 들었는지 모르는 나는 아이들에게 얼마씩 들어 있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언니하고 저하고 5천 엔씩 들어 있었어요. 근데 그거 왜 물어보세요? 우리가 얼마 받았건 엄마가 왜 관심을 갖고 그러세요?"

언제나 말이 빠른 작은 딸이 냉큼 대답을 하며 입술을 뾰족 내밀어 보인다.

"엄마가 뭐, 너네 세뱃돈이 탐나서 그런 줄 알어? 누가 얼마를 주었는지 알아야 엄마도 최소한 그만큼 마음에 두고 갚을 생각을 하는 거야. 얘들이 뭘 알아야지. 그거 다 빚이야. 빚! 갚아야 하는 거란 말야."

"그래요? 갚아야 돼요? 근데 그 집은 우리들만한 애들이 없잖아요."

아이들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든지 눈이 똥그래졌다.

우리 부부가 이소노씨 네를 알고 지낸 5년 가까운 세월 동안을 생각하면 사실 우리가 훨씬 많이 받고 살았던 것이 생각났다. 절기 때마다 절기음식을 해다 주는 것은 물론, 정초면 우리 집 아이들 세뱃돈, 아이들이 방학 때 한국에 나갈 때도 적지 않은 액수의 차비까지 챙겨주지 않나. 몸둘 바를 모르며 받으면서도 우린 늘 갚을 때를 기다려 왔었다.

하다못해 이소노씨의 아들들 결혼식 때라도 축의금을 내려고 했는데 이번 정초에 설 인사를 갔더니 이미 끝낸 결혼식 사진만을 보라고 내민다. 이미 입적(호적에 올리는 것)과 피로연을 끝냈다며.

양가 가족만 참석해서 조촐하게 치렀다고 하는데 왜 우릴 부르지 않았냐고 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소노씨 내외와 우리가 절친하다 해도 그 집 사돈측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데 부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뭐라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일본의 결혼식은 아무나 다 부르는 게 아니고 아주 가까운 친인척, 친구 중에서 꼭 참석하길 원하는 사람만 초청하고 그 인원만큼만 예약하기 때문에 그 외의 사람들은 마음대로 갈 수도 없는 것이다.

이소노씨네 정초 인사를 갔다 돌아오는 길. 남편과 나는 밤길을 걸어 돌아오며 그런 얘기를 했다.

"참 고마운 분들이야, 잔치 치를 때라도 생색 좀 내보려 했더니 기회를 안 주시네. 우리가 부담가질까봐 일부러 연락을 안 하셨나본데…. 우리 몇 년째 매년 그 집으로 설 인사를 가서 대접받고 왔으니 내년엔 꼭 우리 집으로 모십시다!"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을 맞추며 돌아오는 추운 밤길이 조금도 춥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년엔 그저께 다녀온 에모토씨네도 초대해야 하고 오늘 간 이소노씨도 초대해야 하고 내년에 우리가 초대만 해야겠네? 당신 수고 좀 해야겠는데? 하하."

남편이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웃었다. 초대받아 간 즐거움만큼 초대할 즐거움으로 뿌듯해져오는 기분으로 올려다 본, 정초의 겨울 밤하늘은 마치 검은 비로도 자락을 펼쳐놓은 것처럼 부드럽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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