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40회

등록 2006.01.05 08:17수정 2006.01.0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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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화궁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소. 본 맹은 탕마척사(蕩魔斥邪)의 기치를 걸고 결성되었고, 이 자리까지 왔소. 헌데 지금 우리는 탕마척사라는 본래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목숨에 연연하고 있는 것이오. 입구가 막혀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절망감과 외부와 연락조차 할 수 없다는 고립감…. 괴물과 같은 실혼인들과 시검사도에 대한 공포감….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축시키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오.”


구효기는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용화궁은 너무나 정확하게, 무서울 정도로 제마척사맹의 군웅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의 정체를 벗겨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과 두려움은 아주 교묘하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가운데 적들이 만들어왔소. 천마곡 밖에서 단지 다섯 명의 실혼인들을 보내 이미 이곳에 들어오기도 전에 군웅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안겨주었소. 들어오자마자 천마곡의 입구가 막히자 다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꼈소. 더구나 그들은 대대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며 기습만 해왔을 뿐이오. 그리고 자타가 공인하던 불패의 승부사 냉혈도의 시신을 보란 듯이 보내온 것이오.”

이것은 무인 간의 승부가 아닌 일종의 전쟁이었다. 전쟁에 있어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인은 심리다. 사기라고도 하고 반드시 이기겠다는 신념이라고도 표현되는 심리는 전략과 전술보다 우선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

“모용가주께서는 이미 방책을 생각해 놓으신 것 같구려.”

걸걸한 목소리로 동정채(洞庭寨)의 채주인 철부왕(鐵斧王) 나정강(羅晸康)이 말을 건넸다. 둔중한 외모와는 달리 그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수적집단이라고 폄하한다 해도 그는 칠십이수로채 천명이 넘는 인원을 한손에 쥐고 통솔하는 인물이었다. 모용화궁은 빙그레 웃었다.


“방책은 이미 구거사가 마련해 놓았을 것이오.”

이미 자신의 역할은 다 했다는 표정이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듯 구효기에게 시선을 돌리자 좌중의 시선이 모두 구효기를 향했다.


구효기는 가볍게 모용화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고마움의 표시였다. 일단 이 자리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구효기다. 배분이나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일단 모든 것을 구효기에게 맡긴 이상 그 처리 또한 구효기의 몫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모용가주의 지적은 너무나 예리하고 정확해서 감탄이 나올 정도요. 이미 모용가주께서는 방책을 내놓으신 것이나 다름없소. 진방주께서 말씀해 주시겠소?”

구효기는 자신이 결론을 내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 있는 인물들은 모용화궁의 설명으로 결론을 내고 있을 터였다. 자연스럽게 좌중의 의견을 진대관에게 물은 것이다. 진대관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한 마디 내밷았다.

“공격…!”

“그렇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그것이오. 이 회의가 끝나는 즉시 돌아가셔서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하셔야 하오. 하지만 단지 준비뿐이오.”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좌중의 모든 인물들은 구효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공격이 목적이 아니다. 공격준비가 목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군웅들이 받은 충격과 불안감을 잠시라도 잊게 하고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노부는 외부와 연락할 방도를 찾겠소. 최소한 전서구는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오.”

“하늘에 떠 있는 백여 마리가 넘는 수리(猛禽)들을 뚫고 어떻게 전서구를 날리겠다는 말씀이오?”

진대관이 급히 물었다.

“노부는 그 일을 당가의 독혈군자(毒血君子) 당노제(唐老弟)와 천궁문(天弓門)의 단문주(端門主)께 부탁드릴 작정이오.”

독혈군자(毒血君子) 당일기(唐逸奇)와 천궁문(天弓門)의 문주 단세적(端洗積)을 말함이다. 그 두 사람에게 부탁하겠다는 말은 하늘에 떠 있는 수리들을 활을 이용해 떨어뜨리겠다는 의미.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어느 것도 맞출 수 있다는 단세적의 궁술은 이미 중원에 정평이 나 있는 터였다.

문제는 단세적이 천마곡으로 오는 동안 사영천의 살수인 삼색화(三色花)의 기습으로 동행하던 신기수사(神機秀士) 서승명(徐丞明)이 죽고, 화령문(火靈門)의 문주인 진붕(晋朋)과 함께 아직 그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당가의 독으로 보완하겠다는 계획임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우리 모두가 무림과 중원의 평화를 위해 탕마척사의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왔음을 일깨워주는 것이 우선일 것이오.”

구효기는 단호하고도 결연한 목소리로 탕마척사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군웅들의 동요를 막을 수 있는 명분이었다.

“내일 새벽까지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하늘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오.”

그 말에 좌중의 얼굴에는 다소 안도하는 표정과 한편으로는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는 구효기의 어리석음을 한껏 비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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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전월헌이 장담했듯이 너무 좋은 곳이었다. 고요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어서 피를 흘리는 승부를 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과 머물고 싶어지는 곳이었다.

족히 삼사백년은 되었을 것 같은 거목들 사이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기껏해야 사람의 키가 넘지 않을 정도의 잔목과 송(松)이 몸을 비틀며 기암괴석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 잡고, 모래와 자갈이 섞인 평평한 바닥이 거의 삼사십장 정도. 급하지 않게 머물다 흐르는 계곡물이 넓게 얕은 소(沼)를 이루고 있었다. 어둠에 묻혀 그 절경을 다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모든 것을 잊고 머물러 있고 싶은 곳이었다.

“너무 좋은 곳이구려.”

“자네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한때 모든 것을 접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이곳에 초옥을 짓고 머물 생각도 했다네. 아직 그 꿈을 버리지 못했지.”

그의 시선이 암천으로 향했다. 아마 운령을 생각하는 것일게다. 그의 얼굴엔 그리움이 떠올랐다.

“이런 곳에 피를 뿌려야 한다니 안타깝구려.”

“이곳에 뿌려지는 것은 자네 피겠지. 하지만 그 피는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것이네.”

전월헌은 잠시 머리에 떠올렸던 운령의 잔상을 지우며 시선을 담천의에게 돌렸다.

“밤이 길면 꿈도 많다고 했던가? 이제 진짜 시작해 보도록 하세.”

전월헌은 들고 있던 연검을 서서히 지면과 수평으로 치켜 올렸다. 폭은 한 치, 길이는 다섯 자 정도. 종이장처럼 얇은 연검은 일직선으로 세워지지 않고 낭창거렸다. 하지만 그가 팔을 서서히 돌리자 그것은 독이 바싹 오른 독사의 머리마냥 빳빳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검 끝에서 백색의 기류가 뻗치며 길이가 한자나 늘어난 듯 보였다.

그의 검이 수직으로 세워지자 종이장 같이 얇아서인지 검날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얇디얇은 검날 사이로 그의 몸이 가려지고 있었다. 어둠 때문이 아니었다. 담천의는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신검합일(身劍合一)!

그것이었다. 전월헌은 담천의를 용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일을 마칠 생각이었다. 한순간 빛을 토하듯 그의 신형이 무섭게 담천의를 향해 쏘아졌다. 그에 따라 늘어져 있던 담천의의 검이 수평으로 허공을 갈랐다. 검과 검이 허공에서 엉켜 들었다.

빠지지직---!

검과 검이 부닥치며 불꽃을 피어내며 어둠을 밝혔다. 종이장처럼 얇은 연검이었지만 흠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담천의는 당황할 만큼 팔과 어깨에 묵중한 충격을 느꼈다. 더구나 잠시 주춤하는 순간 전월헌의 연검은 부드럽게 굽어지며 담천의의 목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그는 급히 목을 뒤로 젖히며 재차 검을 사각으로 처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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