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위성 사진. 카스피해 동쪽에 아랄해가 보인다(자료 출처 구글).
수량이 감소하면서 원래 염호였던 아랄해의 염류의 농도는 '사해'보다 짙어져 대부분의 어류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철갑상어와 유럽잉어 등 매년 5만t의 물고기를 잡아올리던 식량창고였던 아랄해 주변 어민들은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말라 버린 호수 바닥에서 대기로 치솟아 올랐던 소금먼지가 눈처럼 떨어져 내리거나 바람을 타고 흩날려 주변의 토지가 급속히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빗물에 섞여 들면서 빈혈이나 폐질환을 유발하는 등 주민 건강도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이 돌 것이라며 공포에 떨고 있다. 아랄해 안에 있는 한 섬에는 구소련 시대의 생물화학 병기가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까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고 94년부터 공동으로 아랄해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관계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쉽지가 않다.
2002년에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크스탄 등 아랄해 연안 4개국 대통령이 아랄해를 살리기 위한 국제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최근 유가상승으로 늘어난 오일 달러(1억2000만 달러, 약 1200억 원)를 투자해 2010년까지 아랄해 북쪽 호수의 수량을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늘리기로 했다고 한다.
정치, 경제 등 모든 면에서 권위주의로 흘러버린 소련의 사회주의는 많이 생산하려 하는 생산력주의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일치한다. 생산한 것을 자본가가 관리하고 소련에서는 당이 관리한다. 사람과 자연을 하나로 보는 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관료들의 경쟁적인 업적주의는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본다. 그 결과 러시아의 자연개조사업은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한지 불과 40년 만에 이런 엄청난 재앙을 맞고 있다.
일제의 쌀 수탈정책에 희생된 서해 갯벌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생명의 근원인 물이 골짜기를 빠져나와 내를 이루고 들판을 적시며 다시 큰 강을 이루어 서해로 흘러든다. 그곳에 온갖 바다생물의 모태인 갯벌이 있다. 우리 서해안의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이러한 갯벌을 지속적으로 파괴한 역사였다.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굴곡이 심한 해안선은 간척사업에 아주 유리한 조건이어서 농지 자체가 생산력이었던 고대국가 형성 이래 끊임없이 간척사업이 진행되어 왔다. 만입이 심한 조간대 상부에 제방을 쌓아 그 안에 물을 가두고 주변에 논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소규모 간척사업은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려던 일제는 앞선 토목기술로 갯벌을 메워 논을 만들기 시작했다. 쌀 수탈이 목표였다. 해안선의 드나듦이 매우 복잡했던 변산반도도 일제의 간척사업으로 오늘처럼 밋밋한 해안선으로 바뀌었다.
"1917~1938년에 걸쳐 매립된 면적이 405평방킬로미터에 달하므로 이 시기에 중요한 갯벌은 다 매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당시 매립된 갯벌은 소위 말하는 염생식물이 서식하는 부분이었다. 일반적으로 해안 습지가 생산성이 매우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의 해안습지란 갈대, 칠면초, 해홍나물 등의 염생식물이 자라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일제시대에 모두 파괴되었다."
- 고철환 교수(서울대 해양학)
일제는 더 많은 갯벌을 매립할 계획을 세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갯벌을 공유수면이 아닌 임야로 등기해놓은 것이다. 지금도 부안 곰소만 일대의 일부 갯벌은 임야로 등기되어 있다.
박정희 개발독재의 갯벌 파괴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는 그의 집권 18년 동안 지속적으로 갯벌을 논으로 만드는 간척사업을 벌여왔다. 그 첫 출발이 1963년 3월에 착공한 동진방조제 사업이었다. 부안군 동진면 문포와 하서면 의복리에서 계화도를 잇는 두 개의 방조제를 축조하여 3968ha의 갯벌을 매립하여 2500ha의 농지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이 공사는 일본인들이 계획을 세웠으나 장비의 열세로 실행하지 못한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갯것이란 흔전만전했었고 쌀이 귀했던 시절이라 온 국민의 박수를 받으며 갯벌 파괴가 이루어졌다. 일제 때만 해도 고작 몇 백미터의 작은 제방이었지만 지도를 바꾸는 물막이 공사가 이루어졌다.
1970년대 들어서는 강 하구를 틀어막는 간척사업이 벌어졌다. 안성천과 삽교천 하구를 틀어막는 아산만 방조제와 삽교천 방조제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기공식에 참여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정희는 그날 저녁 김재규의 총탄으로 장기 독재체제를 마감했다. 18년 개발독재는 갯벌파괴로 시작해서 갯벌파괴로 끝난 셈이다.
1980년대 이후의 갯벌 파괴
우리나라 갯벌의 80%는 서해안에 있는데 한국의 서해갯벌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갯벌이다. 1980년 이후 서해갯벌은 보다 대규모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1998년 해양수산부에서 펴낸 <우리나라의 갯벌>을 보면 1987년 이후에 사라진 갯벌 면적이 810.5평방킬로미터이며 이는 전체 면적의 29%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간척사업은 갯벌만 없애는 것이 아니다. 99년 환경부 국정감사에서 농어촌진흥공사와 한국수자원공사 등 공공기관과 당진군, 완도군 등 9개 자치단체가 20개의 간척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총 106.3km 길이의 둑을 축조하기 위해 150개의 산을 토취장으로 이용하여 이 150개의 산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거나 훼손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깎여 나간 토취장의 면적은 서울 남산의 4배나 되는 1194만제곱미터에 이르며 이 과정에서 채취된 토석량은 15t 트럭 483만대 분량에 이른다는 것이다.
현대건설과 동아건설이 시공한 서산지구와 김포지구 간척사업에서부터 현대건설의 시화지구에 이르기까지의 초대형 갯벌파괴는 그 동기가 어이없게도 1979년 회교혁명으로 인해 '중동에서 철수하는 건설업체의 장비활용'이었다.
"건설입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그토록 잘 움직였던 우리의 멀쩡한 건설장비를 왜 갑자기 철수해야만 했을까. 미국 의존적 외교의 필연적인 실패가 원인이었다. 반미감정으로 끓어오르던 중동에서 미국의 입장을 아첨에 가깝게 두둔하던 우리까지 아랍 국가들은 경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양키고홈!'의 우선 대상으로 지목, 허둥지둥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박병상의 환경이야기 가운데 '정부와 자본 길들이기'에서
재벌 건설회사들을 위해 정부가 큰 공사판을 차려준 것이다. 이 무렵부터 한국은 국내총생산에서 건설업의 비중이 20%에 육박함으로써 토건국가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토건국가란 건설업 혹은 토건업이 팽창하면서 이를 둘러싼 거대한 먹이사슬이 정치권력을 형성하고 나아가 국가의 성격을 여기에 맞도록 변형시킨 국가유형을 말한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새만금사업
새만금사업은 3김이 정치 활동을 재개한 87년 대선에서 호남인심을 사로잡기 위한 득표전략차원에서 태어났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세 후보 모두 새만금사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들이 내세운 새만금사업은 그 규모면에서 개발에 목말라 하던 전북도민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긴 33km의 방조제를 쌓아 부산광역시만 한 넓이인 4만100ha의 갯벌을 매립하여 2만8300ha의 토지를 조성한 뒤 복합산업단지를 만들어 대중국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에서 나라살림을 맡은 경제 각료들은 이 사업의 시행을 반대하였다.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1991년 7월 제1야당이던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와 노태우 대통령의 영수회담에서 김대중 총재가 지역의 숙원사업임을 내세워 사업의 시행을 강력히 요구하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여 이 해 11월 28일 성대한 기공식을 갖고 매년 예산이 투입되는 계속사업으로 방조제 축조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가능했다. 이듬해 4월에 총선이 있을 예정이었던 것이다. 이미 9월에 착공한 홍보지구 간척사업 기공식이 12월 5일에 있었으며 12월 7일에는 고흥지구 간척사업 기공식이 열렸다. 불과 열흘 사이에 세 곳에서 간척사업 기공식이 열린 것이다.
신개발주의로 탈을 바꿔 쓴 새만금사업
1996년 시화호가 본래 목적인 담수호를 달성하지 못하고 결국 해수유통을 하게 됨으로써 새만금호도 시화호의 전철을 밟지 않겠느냐는 문제제기가 일게 되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며 마침내 새만금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가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새만금사업은 처음부터 농지를 조성하는 사업이며 그 목적이 한번도 바뀌지 않았음이 밝혀졌으나 이미 전북 도민들에게는 새만금사업은 지역발전을 가져다 줄 희망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박정희 시절 조국 근대화와 빈곤 극복을 명분으로 등장한 개발주의 체제의 관성이 가장 낙후된 지역인 전북에서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