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한 일이었다.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었던 하루를 무사히 보낸 구효기는 좀 더 냉철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당형은 한 순간에 폭죽처럼 터져 비산되는 암기를 가지고 계시오?”
말을 꺼낸 사람은 천궁문(天弓門)의 문주 단세적(端洗積)이었다.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된 듯 했지만 그는 얼굴색은 아직 정상이 아닌 듯 했다. 질문을 받은 독혈군자(毒血君子) 당일기(唐逸奇)는 심히 곤혹스러웠다. 사실 암기는 남에게 공개되면 안 된다. 특이하고 치명적인 암기라면 더욱 그렇다. 암기란 남에게 알려지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마곡에 갇혀있는 제사척사맹 군웅들의 바람일 뿐 아니라 당일기 자신 역시 본가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단세적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또한 지금 단세적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도 되었다. 천궁(天弓)은 천궁문을 지탱하는 문파의 상징이자 기병(奇兵)이다. 수리 정도를 사냥하기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천궁시(天弓矢)는 제조기법이나 제련법이 까다로워 단세적이라도 가진 것이 백여 개를 넘지 않는다. 수백 마리의 수리를 없애기에 매우 부족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결국 단세적은 천궁시(天弓矢)에 폭죽처럼 비산되는 암기를 달아 허공을 맴돌고 있는 수리를 향해 쏘려는 것이다. 그 암기에 당가의 독이 발라져 있다면 매우 큰 효과를 볼 것이었고, 그것은 구효기의 생각이기도 했다.
“적절한 시간에 터지도록 작동되는 매우 정교한 것이라야 되겠구려.”
화살이 수리의 무리 쪽으로 날아가는 순간에 터져주어야 효과가 클 것이었다. 만약 천궁시를 날리는 순간 터져버린다면 단세적은 물론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위험하다.
“이를 말씀이겠소?”
당일기(唐逸奇)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들어 주어야 했다.
“최소 이틀 정도는 필요하오.”
그러자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구효기가 끼어들었다.
“시간이 없소. 최소 내일 오후에는 맴돌고 있는 수리의 반 이상을 없애야 하오.”
“서두른다면 단문주가 위험 할 수 있소.”
암기는 만들기도 어렵지만 시전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작동해야 그 효과를 볼 수 있다. 시전하는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 암기다. 구효기는 단세적을 바라보았다.
“일단 해봅시다. 갑주를 입고 해약을 복용하면 되지 않겠소?”
위험한 일이었지만 단세적은 그 위험을 감수하려는 것 같았다. 일개 소문파에 머물고 있는 천궁문이 전 중원 군웅들이 모인 제마척사맹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고무된 것 같았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소.”
하는 수없이 당일기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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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좀처럼 자신이 가진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다. 운명이라고…. 왜 살아야 하는 지도 모르고,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변명처럼 운명이라고 돌려버린다. 불가(佛家)에서는 전생에 행한 삼업(三業)의 결과라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것도 아닌 다음에야 그저 이생에서 악업을 짓지 말라는 허울 좋은 가르침일 뿐이다.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싶어도, 그래서 훌훌 털어버리고 벗어났다 해도 인간은 어느 틈엔가 다시 본래의 삶 속으로 돌아온 자신을 보게 된다. 그 형태와 빛깔이 어떻게 변형되었던 간에 인간은 인간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말이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회의와 두려움은 그를 주춤거리게 했지만 어차피 걸어가야 할 운명이었다. 주위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오다가 짙은 피비린내에 걸음을 멈췄다. 사당 앞에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삼십여 구가 넘게 보이는 시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곳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미 낡고 오래된 담장은 무너져 내리고 사당 역시 전면 벽체가 무너져 내려 흉측스럽게 속을 내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사당 안에 빽빽이 서 있던 석상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어 사람의 시신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죽어 있는 인물들의 의복은 각양각색이었다. 시신들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르쳐주고 있었다. 시신들 중 절반 이상이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분명했다. 이들은 어떻게 이곳을 알고 온 것일까? 여하튼 시체로 보아 적지 않은 무림인들이 몰려들었고 이곳을 지키는 인물들과 혈전을 벌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쭉 둘러보다가 사당 안으로 걸음을 떼었다. 헌데 그가 몇 발자국을 떼어 무너진 담장을 넘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의 귀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담제… 어서 사당 안으로 들어오게. 나는 왼쪽 관음상 뒤에 있네.’
전음의 주인은 백결이었다. 약속대로 백결이 이미 와 있었다. 허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담천의는 급히 신형을 날려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사당 바닥에도 다섯 구의 시체가 쓰러진 석상들과 엉켜있었다. 의복이나 검에 매달린 수실로 보아 무당과 화산의 검수들인 것 같았다.
“많이 다치셨소?”
관음상 뒤에 있는 백결의 모습은 악전고투를 치른 듯 전신이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희미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도 피가 묻어 굳어 있었다.
“그러는 자네도 성한 것 같지는 않군. 하기야 전월헌을 상대하고도 그 정도라면 아주 다행이지만 말이야….”
담천의는 일단 백결의 상처를 살폈다. 그는 전신에 일곱 군데의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 세 군데는 매우 심각해 보였다. 우선은 백결의 가슴에 난 상처였다. 금창약을 뿌린 것 같았는데 아직 완전하게 지혈되지 않은 상태라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가슴 부위의 몇 군데를 눌러 지혈을 시켰다.
“금창약 남은 것 있소?”
백결이 왼손에 들고 있던 가죽주머니를 내밀었다. 자신이 처치하다 쥐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가슴에 금창약을 골고루 뿌리고 나서는 그의 허벅지와 팔뚝에 난 상처를 살폈다. 문제가 있었다. 근육이 상해 자칫 치료를 잘못하면 팔다리를 당분간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움직일 정도는 되네. 연동에 들어가기에는 지금이 아주 좋은 시기라네.”
담천의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당파의 제자로 보이는 시신의 허리띠를 풀어 뜯기 시작했다. 실밥을 뜯어내고는 쭉 찢어 속에 겹쳐댄 천을 여러 겹으로 뭉쳤다.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어찌 알았는지 무림인들이 몰려들었던 것 같네. 개방의 정보망이야 중원 최고가 아닌가? 그들로서는 천마곡의 입구가 봉쇄되었는데도 백련교도들이 나다니는 게 이상했겠지. 우리에겐 오히려 잘 된 일이네.”
아마 이런 일이 없었다면 연동을 들어서는데 처음부터 성가셨을 것이다. 담천의는 상처부위에 금창약을 다시 뿌리고 여러 겹의 천을 댄 후에 단단히 동여매기 시작했다. 근육이 상한 경우 당분간 단단히 동여매어 근육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설사 움직이더라도 동여매게 되면 다시 터질 가능성이 훨씬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움직일 수나 있겠소?”
“이 시기를 놓치면 힘들게 될 것이네. 더구나 나는 이 연동으로 꽤 많이 다녔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네. 물론 그들이 변형시켜 놓았다면 문제겠지….”
“혹시 우문주는 보지 못하셨소?”
장내는 백결이 먼저 떠났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은 것이다.
“자네와 같이 있지 않았나?”
역시 백결은 모르고 있었다. 담천의는 잠시 망설였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생사여부를 알 수 없었지만 우교가 보면 알 수 있는 표식을 남겨놓았다. 표식을 남기고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담천의는 백결을 부축해 일으켰다.
“좋소. 일단 들어가 봅시다. 입구는 어디요?”
담천의는 관음상에 우교가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마지막으로 남기고는 절룩거리며 걷는 백결의 뒤를 따랐다. 나한상 뒤로 닫히다가 멈춘 석문이 보였다. 석문은 개방의 제자로 보이는 인물의 시신이 끼어 있는 바람에 닫히다 멈춘 것 같았다.
“헛…!”
백결이 몸을 옆으로 비틀며 연동 안으로 발을 들여 놓다가 갑자기 다급한 신음을 밷았다. 뒤를 따르던 담천의가 백결의 몸을 안고 옆으로 굴렀다.
스으으-----!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무언가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백결의 귀밑 목덜미에서 핏물이 배어나왔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빌어먹을…. 기관을 모두 발동시켜 놓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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