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 그리고 자전거 -2

등록 2006.01.13 17:22수정 2006.01.14 20:0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06년 1월 1(해) 일. 비 오고 흐림.


한림 - 금릉 - 월림 - 분재예술원 - 평화박물관 - 오설록녹차박물관 - 상창 - 창천

가벼운 눈발과 함께 2006년을 맞았다. 지난 해보다 힘과 돈 없는,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살기가 한결 편해지는 세상을 꿈꾼다. 세계와 삶이란 너 때문에 내가있다는 공동체의식이 넓혀지고 깊어지는 과정이다.

길을 나서려는데 민박집 식구들이 모두 나와 좋은 여행을 기원해 줬다. ‘샘터민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집 앞에 샘터가 있고, 곧장 한라산이 보인다. 예전에는 항상 물이 넘쳐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는데 지금은 샘터에 물이 없다. 중산간에서 물을 뽑아 써버리기 때문이라는데 가장 큰 주범은 골프장이란다. 대학 때 하지 말아야 할 일번이 당구치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평생 하지 말아야할 일 중 하나가 추가되었다. 골프 치는 일이다. 쭉 뻗어가는 호쾌한 샷에 생태계가 흔들리는 것이다.

흐린 날씨에 가벼운 눈발을 이기며 한림항에 닿았다. 기쁜 마음에 소리를 질렀고, 뒤돌아보다 앞에 있던 작은 돌에 자전거 앞바퀴가 걸려 넘어졌다. 여행 내내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며 작은 안전에도 크게 신경써야함을 깨달았다.

한림수목원 정문에서 물을 마시며 금능에서 창천까지 중산간 도로를 달리기로 결정하였다. 금릉에서 월림까지 경사가 약 5°정도 되는 계속된 오르막길이다. 기어조작을 민감하게 하여 자전거와 내 몸이 하나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걷다 타다를 반복했다. 오히려 걷는 것이 더 편하다. 자전거를 타기에 몸이 덜 적응한 것도 있지만 항문을 중심으로 견딜 수 없는 엉덩이 아픔이 척수를 가로질러 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속도에 대한 대가일까? 최소한 자전거여행 일주일 전부터 엉덩이를 단련하지 못한 준비부족도 크다.


오르막이 끝나갈 즈음 갑자기 체력이 크게 떨어졌다. 입에서 단내가 날쯤 월림삼거리에 도착했다. 길옆 집에서 돼지를 잡고 있었다. 서슴없이 다가섰는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어서 오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염치불구하고 생간과 고기를 소주에 정신없이 먹고 나서야 어떤 일인지를 물었다.

딸이 결혼하는데 동네 사람들을 대접하기위해 200㎏이 넘는 돼지 4마리를 잡은 것이다. 3일 동안 동네 사람 모두를 대접한다는 말에 기가 죽었다. 아직도 애경사를 마을 전체 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살아있고,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규모에 놀랐다. 많이 먹으라며 권하는 중에 자전거를 타니 술은 조심해야한다는 인심에 눈물이 글썽일 만큼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람들의 마음 씀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지만 굳이 마다하는 주인께 딸 신혼여행비라며 작은 정성을 보탰다. 인심과 고기, 술로 따뜻하게 재충전된 몸으로 길을 나섰다. 내내 무겁고 아프던 길이 가볍다.


'분재예술원' 소나무
'분재예술원' 소나무최성

'분재예술원' 정원에 있는 비단잉어
'분재예술원' 정원에 있는 비단잉어최성
‘생각하는 정원(성범영)’이라는 책을 통해 제주에 오면 항상 가보고 싶었던 ‘분재예술원(772-3701~3)’에 도착했다. 책을 보면서 대단하기는 하지만 분재란 나무를 사람의 힘으로 억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천박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은 놀라움, 그 자체다. 한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세월을 견디면 능히 우주와 운명을 창조하는 감동이 전해온다. 나무의 성질과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나무에게는 운명이 되고, 사람에게는 예술이 되는 경지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나무와 서로 긴밀하게 이야기하여 깊은 정을 나누는 듯한 교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분재로 관리하면 자연 상태에서 훨씬 수명이 길어져 천년을 견딘다는 사실에 전율이 느껴졌다. 사람은 세계와 삶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만물의 영장이다.

이러한 보물을 우리나라보다 분재 종주국이라는 중국에서 또 일본과 미국에서 먼저 가치를 인정했던 세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IMF사태 와중에 국내 종묘회사들을 줄줄이 외국에 넘긴 생각 없는 무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분재예술원’ 안에 있는 옹기뷔페에서 점심을 달게 먹었다. 사람들이 많았다. 비를 맞는 길을 다시 나섰다. 가서 되돌아와야 하는 길임에도 ‘평화박물관(772-2500)’으로 향했다. 월림에서 사람들이 인공으로 파서 만든 일본군 진지라며 가보기를 권했고, 우리도 제주 곳곳에 있는 일본군 주둔 흔적에 관심이 많았다.

이 길을 다시 올라와야한다는 부담보다 계속된 내리막길이 주는 질주쾌감이 더 크다. ‘평화박물관’은 ‘가마오름’에 굴을 파서 만든 일본군 진지를 주제로 해서 만든 사설박물관이다. 일제시대 일본군들의 잔학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과, 진지에서 나온 물건들을 전시하는 건물에서 영상물을 보려는데,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피곤한 몸이 앉기만 하면 누워 자고 싶은 것이다. 박물관장님의 안내로 오름에 있는 진지 안으로 들어갔다. 바위처럼 단단한 마사토질에 곡괭이 자국이 선명했다. 일일이 사람 힘으로 굴을 파서 통로를 만들어 곳곳에 필요한 공간을 배치하는 형태였다. 이곳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복원된 공간은 전체의 1/10에 불과하고, 제주에 368개의 오름이 있는데 100개 이상의 오름에서 이러한 진지를 확인할 수 있단다.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위해 우리 땅을 전쟁의 불더미에 내어놓으려 한 것이다. 더구나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만 교묘히 강조하여 다른 나라에 생채기를 입혔던 제국주의 참상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무서운 일이다. 아니 지금도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딸이 전교조에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며 개정된 사립학교법에 반대하여 장외집회를 열고 다니는 우리 현실이 더 무섭지 않은가?

식민의 역사를 극복한 것은 일본관동군 출신 장교가 아니라 그 속에서 생채기를 입은 우리 민중이다.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일본군의 채찍 아래 곡괭이 하나로 자기 땅을 파서 일본군 진지를 만들었던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 군대가 주둔해있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벌어지는 미국의 전략에 우리 생존이 달린 피 같은 땅을 내줄 것을 강요당하는 지금은 미국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아직도 식민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빠르게 질주하며 내려왔던 길을 아픈 엉덩이를 어기적거리며 걸어서 올라갔다. 좋지 않은 날씨와 몸 상태가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차에 관심이 많고, 즐기면서도 ‘오설록차박물관’에서 오는 여유로움 편안함에는 이질감을 느껴 금방 나와 버렸다. 자전거보다 안락한 자동차를 타고 와서 이국적인 풍광을 즐기는 것이 어울리는 장소이다.

창천에서 감귤농장을 하는 광헌 선생님 여동생 집에서 숙박을 하기로 했다. 오르고 내리는 길을 반복하다 상창에 도착했다. 가게구석에 있는 탁자에 덮어두지 않아 약간 마른 듯한 김치, 손님에게 도무지 신경을 주지 않고 알아서 하라는 주인, 조명이 없어 흐린 바깥 날씨가 그대로 투영되는 실내, 어렸을 때 ‘점빵’ 분위기가 나는 상창초등학교 앞 가게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허기지고 지친 몸이 말라빠진 김치와 삶은 계란에 마시는 막걸리를 빠르게 당겼다. ‘덕산’이 바라보이는 집에 오니 마중 나갔다 허탕 친 아이들이 외삼촌을 부르며 제일 먼저 반겼다. 유기농으로 재배된다는 귤을 크기 별로 선별하는 작업에 바빴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귤을 몇 개 먹고 누구랄 것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저녁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져 고통스러워하는 일행을 이 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기를 이용하여 치료하고, 안마를 해주었다.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한다. 저녁에 집주인의 배려로 ‘용머리 해안’이 바라보이는 ‘바다목장횟집’에서 맛있는 회에 소주로 서로의 행운을 기원했다.

새해 첫 날이다. 제주의 참맛을 느끼려거든 오름에 올라보라는 도움말도 있었다. 그렇다. 여행은 느림과 되돌아봄의 미학이다. 빠르면 많은 것을 그냥 지나치거나 놓친다. 컴퓨터 때문에 얼마나 정신없어지고, 노동 강도가 세졌는가?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이 깊게 들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이들을 놀게하게 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초등학교교사. 여행을 좋아하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지는 파행적인 현상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2. 2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3. 3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4. 4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5. 5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