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그때 하찮은 수컷에 불과했다"

시인 이승철, 세 번째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 펴내

등록 2006.01.17 16:45수정 2006.01.1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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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5천 볼트의 전류를 기운차게 뿜어내며
2호선 전동차가 바람을 헤치며 돌진한다.
당산철교 밑으로 푸르딩딩한 강물이 떠가고
당인리 발전소 저 켠 치솟는 굴뚝 연기들이
사쿠라꽃처럼 화들짝 꿈틀거리고 있다.
나는 일순, 덜컹이다가 쓰라린 공복을 어루만졌다.
나는 지금 한 마리 낙타로
인생이라는 신기루를
무사히, 잘, 건너가고, 있는가?
옛사랑이 다만 흐릿하게라도 남아 있는 한
세상을 사는 존재의 형식을 되묻지 말아야 한다.
전동차 유리문 너머 오늘 또다시 수타국수처럼
수십 수백 가닥으로 내리쳐질
한 사내의 누리끼리한 얼굴
저리도 점잖게 미소 짓고 있다. - 28쪽, '당산철교 위에서' 모두


한 마리 낙타가 되어 터벅터벅 길을 걷다


a 시인 이승철 세 번째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

시인 이승철 세 번째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 ⓒ 이종찬

시인 이승철의 시의 빛깔은 구름빛이다. 그렇다고 시인의 마음까지 몽땅 구름빛이라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오늘도 이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그 구름빛에서 벗어나 저 푸르른 '희망'이란 품에 안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시인이 "인생이라는 신기루"가 잔뜩 끼어있는 도회의 사막에서 한 마리 낙타가 되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시인은 때로 당산철교 위에서 "2만5천 볼트의 전류를 기운차게 뿜어내며" 바람처럼 세차게 달려가는 2호선 전동차가 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의 그런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시인의 나이는 이미 인생의 끝자락으로 달려가고 있는 구름빛이다. 게다가 지금은 "쓰라린 공복" 중이다.

시인은 재빨리 그 "쓰라린 공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를 어루만진다. 하지만 삶의 순간 순간이 빚어낸 그 쓰라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 그뿐이랴. 깡소주 한 잔 나눠 마시며 세상살이를 나누고, 저마다의 울분을 헛구역질하고, 시를 이야기하면 금세 사라지던 그 "쓰라린 공복"을 나눌 사람조차도 하나 없다.

한때 젊은 날, "호남선 밤기차 타고 첫사랑 같은 여자와 붉은 피 맨주먹으로 무작정 상경을 작정하던 일천구백팔십삼년 그 시월의 마지막 밤"(내 청춘의 비망록)처럼 서로의 아픔을 살갑게 나누던 문인들도 그의 곁을 떠났다. 그와 피붙이처럼 지냈던 채광석도 가고, 고정희도 가고, 김남주도 가고, 그리고 기형도, 김소진, 윤중호도 갔다. 그만 홀로 이 모진 세상에 남아 구름빛 진혼가를 부르고 있다.

시란 자기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까발리는 것

"자기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는 것, 그럼으로써 자기 영혼에 메스를 가한다는 것, 그리하여 미욱한 이 세상을 향해 일갈하고 싶다는 것-이것이 최근 나의 시작태도다./ 청춘의 한 시절이 허위단심 떠나갔고, 저만치서 불혹의 아침이더니 이제 나는 인생의 후반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 '자서' 몇 토막


지난 2001년 두 번째 시집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실천문학사)을 펴냈던 시인 이승철(49)이 5년 만에 세 번째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솔)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지천명의 나이를 코 앞에 둔 시인이 1980년 5월의 광주(시인은 그 충격으로 대학을 그만 두었다)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삶을 꼼꼼하게 되짚어보고 있다.

'마포 강변에서' '갈대' '세상에서 가장 외로웠던 날' '만다라화들이 영혼의 뻘밭에서 출렁일 때' '너의 촛불은' '기차는 열두 시에 떠났다' '그 외롭던 강화 선창가' '종삼에서 운주사 와불을 보다' '어느 날 무등을 보다가' '딱 한 잔 만 더' '독도가 다케시마에게 하는 말' '내 청춘의 비망록' 등 43편이 그것.


시인 이승철은 자서에서 "욕망과 해탈의 이중주 속에서 오늘도 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지난 세월 돌아보니 미련에 가득한 날들뿐, 오늘 또다시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게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한때 저 푸르른 영혼의 삭정이를 잉태하고 싶었던 나의 시는 이제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존재하는가"라고 되짚는다.

시인은 욕망과 해탈 사이를 오가며 시를 씹는다

산다는 게 저처럼 꼿꼿해도 되는 것이냐
마침내 한 사내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하반신을 지상 밖으로 돌출시키는 그 시각,
산야초 나풀대는 저 너머 어디쯤
저 홀로 독경 소리가 그윽하였다. - 30~31쪽, '배롱나무 님께' 몇 토막


그렇다. 시인은 "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라는 지천명의 나이 앞에서도 이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욕망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욕망의 터널 속에서 벗어나 마침내 해탈의 골짜기로 들어서는가 하면 어느새 욕망이 큰 보자기를 들고 나타나 해탈을 보쌈해 버린다. 싫어, 하고 해탈이 아무리 몸부림 쳐보아도 아무런 소용없다.

온몸으로 시를 밀고 나가는 시인
시인 이승철은 누구인가?

▲ 시인 이승철
ⓒ솔
"이승철의 시를 밀고 나가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청춘의 가마솥을 달구어내던' 오월 광주 이후, 가파른 세월을 거쳐온 그의 시는 아직도 결기를 삭이지 못한 짐승 몇 마리쯤 기르고 있는가 보다. 나는 순치(順馳)되지 않는 그 욕망과 야성이 좋다." - 정희성(시인)

시인 이승철은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1983년 시전문 무크 <민의> 2집에 시 '평화시장에 와서' '용봉동의 삶' 외 7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4년부터 나남, 인동, 산하 출판사 편집장 및 도서출판 황토 대표, 작가출판사 편집위원 등을 맡아 출판문화운동을 펼친 시인은 시집으로 <세월아, 삶아>(1992),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2001)을 펴냈다.

지금,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국장, 시 전문지 <시경> 편집위원, <도서출판 화남>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 이종찬 기자
어느새 "물컹한 성욕들이 뭉쳐 야밤을 불러왔고/ 그대 살결에 취해 석 달 열흘이/ 석유 먹은 가슴인 듯 온종일 깔딱거렸다". 그리고 "천지가 오르가슴 된 듯/ 한껏 암내를 풍기는 당신 앞에서/ 우린 그때 하찮은 수컷에 불과했다"(배롱나무 님께)라고 느낄 그즈음 "산야초 나풀대는 저 너머 어디쯤" 해탈 같은 "저 홀로 독경 소리"가 들려온다.

시인은 이 세상을 향한 그 어떤 욕망을 생의 찌꺼기처럼 풀어낸 뒤 허무처럼 다가서는 해탈 앞에 서서 말한다. "허허로운 삶의 한 자락 끝을 붙잡고 서 있는 사람들. 정녕 난 가당찮은 저 시간들 속에서 무엇을 갈망하였나"라고. 이어 "이러할 때 내 시는 그 누구에게 한 자락 진실의 외침이라도 던져줄 수 있을 것인가"라며, 자신의 시를 잘근잘근 씹는다.

그 노숙자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그 와불이었다

영등포역에서 새우등처럼 하룻밤을 구부리고 있던 그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손깍지 끼며 한동안 천장만 바라보았다. 인간이 절망하는 곳에 어떠한 신(神)도 살 수 없으며, 삶이 밝을 때나 어두울 때도 결코 인생을 욕하지 않아야 하며,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금언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줄 몰라 아침이 올 때까지 난 고민하였다. - 72쪽, '종삼에서 운주사 와불을 보다' 몇 토막

시인은 서울 시내 역전 주변이나 지하도 곳곳에 드러누워 뼈아픈 하루하루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노숙자들을 눈여겨 바라본다. 그리고 시인이 스무 살 때 광주에서 노숙자로 떠돌던 때를 떠올린다. 그때 시인은 "얇은 비닐조각을 이불처럼 덮어쓰며 광주학생회관 계단 밑에서 별꽃을 헤아리다가 새벽이슬"을 맞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근데, 땡겨울 밤 열두 시도 한참 지난 시각, "혹한의 한속기가 사타구니 속을 송곳처럼 꿰뚫고 가던 때", 종로3가역 전화박스 모퉁이 옆에 허름한 노인이 한 분 누워 있다. 백발이 성성한 그 노인은 두 손을 아래로 합장한 채다. 그 모습이 언뜻 시인의 눈에 "운주사 천불천탑 와불(臥佛)"처럼 보인다.

이윽고 시인의 눈에 운주사 와불처럼 드러누운 그 노인과 한때 노숙자로 떠돌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때 문득 시인은 "인간은 패배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라는 깨침을 얻는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망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는 일이며, 흥했다고 해서 기쁨에 도취되지 않는 것"이라 여긴다.

"산다는 것은 쓸쓸하게 버팅기는 것"

나 또한 사랑을 잃고도
훠어이 훠어이 한세상 잘 살아왔네.
보습 한 자루 저 홀로 인광처럼
반짝이는 송정리 극락강가
오월 삐비꽃 울음들이 휘달려와
애문 가슴 무너지도록 귀싸대기 친다.
때론 나 홀로 널 치어다볼 때마다
산야에 가득한 철쭉꽃 연붉은 가슴
생때 같은 그날의 너만을 생각했다.
그래 산다는 것은 그대 큰 침묵으로
한 생애가 온통 말갛게 발목 질 때까지
참으로 쓸쓸하게 버팅기는 것임을
나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네. - 75쪽, '어느날 무등을 보다가' 모두


시인은 언제 바라보아도 "큰 침묵"으로 우뚝 서있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나날들을 차분히 되짚는다. 그 수많은 나날들 중 가슴에 가장 깊숙히 못이 되어 박힌 것은 사랑이었다. 그동안 시인은 그 지독한 사랑 때문에 "애문 가슴"도 많이 무너뜨렸다. 들과 산에 가득 핀 연붉은 철쭉꽃을 바라보면 "생때 같은 그날의 너"가 자꾸만 떠올랐다.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잃어버린 사랑은 욕망이다. 그리고 무등산은 그 욕망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그리하여 다시금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게 만드는 해탈이다. 시인은 "큰 침묵으로/ 한 생애가 온통 말갛게 발목 질 때까지/ 참으로 쓸쓸하게 버팅기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욕망과 해탈의 속내를 꼼꼼하게 더듬고 있는 것이다.

이승철 시인의 시의 맛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이 자서에서 "욕망과 해탈의 이중주"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인은 욕망과 해탈을 따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욕망과 해탈은 같은 것이라는 투다. 다시 말하자면 그 어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는 그 어떤 낡은 것에서 반드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산철교 위에서>는 이승철 시인이 그동안 살아온 나날들에 대한 진혼가다. 그 진혼가 속에는 시인의 눈에 비친 것, 몸과 마음으로 서로 부대낀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다. 문인이든, 노숙자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무등산의 삐비꽃이든 상관없이 시인의 가슴에 일단 닿으면 그대로 욕망과 해탈의 진혼가가 되어 불려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의 신문>에도 보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의 신문>에도 보냅니다.

당산철교 위에서

이승철 지음,
솔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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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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