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비망록

이승철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을 읽고

등록 2006.02.06 19:55수정 2006.02.06 19:55
0
원고료로 응원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국장, 시 전문지 <시경> 편집위원, 도서출판 화남 편집주간으로 일하고 있는 이승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가 도서출판 솔에서 나왔다.

a 이승철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

이승철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 ⓒ 솔

1958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인 이승철 시인은 호남대 행정학과를 다니던 중 5·18 광주항쟁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1983년 시 전문 무크지 <민의> 제2집에 시 '평화시장에 와서' '용봉동의 삶' 외 7편으로 등단한 그는 1984년부터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출판계에 입문하여 나남, 인동, 산하 출판사 편집장 및 도서출판 황토 대표, 작가출판사 편집위원 등을 두루 역임했다.


1992년에 첫 시집 <세월아, 삶아>(두리)를, 2001년에 두 번째 시집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실천문학사)을 상재한 바 있다. 새해 벽두에 나온 이승철의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는 불의 시대 팔십 년대를 20대 청년기에 지나고, 이제는 40대 후반이라는 중년에 접어든 한국 남성의 자화상을 직설적이고도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모진년 만나 내가 모진 놈이 되었는가.
아니면, 모진 놈 만나 그녀가 모진 년 되었나.
하동 땅 화개 지나 압록 가는 길
앞산도 첩첩 뒷산도 막막
설운 봄날이 저리 짠하게 저물어갈 때

이 꽃 피면 오실랑가
저 꽃 피면 오실랑가
꽃 피고 지고 그대 어느
산그늘에 서 있는지---

김용택 작시의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창호지 빛깔보다 더 하이얀
벚꽃들이 예서 저서 난분분할 때
그리 니기미 쓰으벌, 나도 한때는
내일은 비록 산수갑산 갈망정
뉘처럼 싸하게 가슴 뭉개지는 사랑
한 번은 그래,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
이런 니기미들아, 모진 년 만나
내가 정말 모진 놈이 되었단 말인가.
- '압록 가는 길' 전문


가슴 찡한 그리고 모진 사랑 노래다. 시인의 현재적 삶의 이력이 오롯이 드러난다. 압록은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우리 나라에서 일몰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곳이다. 이 아름다운 압록에서 시인은 무너져버린 자신의 지난 사랑과 독신의 현재적 삶에서 오는 서러운 심사를 직정적(直情的)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쏟아내는 그의 어법이 이 시의 서정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는 이승철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에 편재된 대부분의 시에서도 드러난다. 이승철 시인은 '自序'에서 이러한 시작 태도를 "자기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는 것, 그럼으로써 자기 영혼에 메스를 가한다는 것, 그리하여 미욱한 이 세상을 향해 일갈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능수능란한 리듬감을 선보인 미당의 시를 떠올렸다고 하면 시인이 언짢아할까. 2연에서 보이는 높은 리듬감은 말할 것도 없고, "모진 년, 모진 놈, 니기미 쓰으벌, 이런 니기미들아" 등의 비속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정의 힘과 자연스러운 리듬감이 이 시를 명편으로 만들고 있다.

이승철의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는 "구들과 천장이 없는 세월", "조석으로 삐꺽거리는 관절들", "넝마 같은 세월들만 잉잉대며 다가왔다"로 대변되는 시인이 겪은 삶의 이력(履歷)을 고해성사 하듯 풀어놓고 있다.


이와 함께 '노숙자' 연작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게 136명이 학살당한 아픔을 노래한 '하미에서', 미군의 이라크 침공을 풍자한 ''렛츠 고!'라고?' 등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의 시는 현실에 굳건히 발 딛고 있다.

2만5천 볼트의 전류를 기운차게 뿜어내며
2호선 전동차가 바람을 헤치며 돌진한다.
당산철교 밑으로 푸르딩딩한 강물이 떠가고
당인리 발전소 저켠 치솟는 굴뚝 연기들이
사쿠라꽃처럼 화들짝 꿈틀거리고 있다.
나는 일순, 덜컹이다가 쓰라린 공복을 어루만졌다.
나는 지금 한 마리 낙타로
인생이라는 신기루를
무사히, 잘, 건너가고, 있는가?
옛사랑이 다만 흐릿하게라도 남아 있는 한
세상을 사는 존재의 형식을 되묻지 말아야 한다.
전동차 유리문 너머 오늘 또다시 수타국수처럼
수십 수백 가닥으로 내리쳐질
한 사내의 누리끼리한 얼굴
저리도 점잖게 미소 짓고 있다.
- '당산철교 위에서' 전문


선배 시인 정희성은 이 시집을 두고 "오월 광주 이후, 가파른 세월을 거쳐온 그의 시는 아직도 결기를 삭이지 못한 짐승 몇 마리쯤 기르고 있는가 보다. 나는 순치(順馳)되지 않는 그 욕망과 야성이 좋다. 그는 많은 시인들이 너무 일찍 손놓고 떠나간 세상을 끌어안고 몸부림치고 있지 않는가. '2만 5천 볼트의 전류'가 전차를 몰고 가듯이, 이 절망이 그의 시를 기운차게 밀고 갈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이 시는 이승철 시인의 '자화상(自畵像)'으로 읽혀진다. 당산철교 위 2만5천 볼트의 전류로 달리는 전동차는 이 패륜의 자본주의 시대에 맞서 삶의 진실을 찾아 거리를 달려가는 이승철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 시 1편을 꼽으라면 나는 맨 뒤편에 있는 장시 '내 청춘의 비망록'을 들겠다. 시로 쓴 리얼리즘의 현대문학사라 부를 만한데, 그 속에는 지난 년대 우리들의 서러움과 슬픔, 그리움이 다 들어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승철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솔,2006)

덧붙이는 글 이승철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솔,2006)

당산철교 위에서

이승철 지음,
솔출판사, 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4. 4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5. 5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