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왜 이리 물기가 많지? 물이 흐르는 곳 같지는 않은데….)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담천의가 나직하게 말했다. 바닥은 발이 빠질 정도로 질척질척했다.
“바닥에 물기가 많으니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조금 더 내려가 보니 옆과 위에도 물기가 느껴졌다. 사실 동굴은 물이 배어나와 고이거나 흐르는 곳도 많다. 하지만 내리막으로 되어 있는 동굴 벽에 일정한 금을 그어 놓은 듯 물기가 배어 있고, 그 선을 따라 천정까지 물기가 배어 있다면 이것은 분명 물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흔적이었다.
(이런 곳에 갑자기 물이 들어오면 꼼짝없이 수장(水葬)될 판이군.)
그는 내심 더욱 경각심을 높이며 앉은걸음으로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석실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원형이었는데 바닥과 천정은 물론 벽까지도 원형이어서 마치 둥그런 구(球)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입구는 그가 들어온 곳까지 모두 네 개였는데 모두 허리를 구부려야 빠져 나갈 정도로 작았다. 한편 움푹 들어간 원형의 바닥에는 아직 발목이 잠길 정도의 물이 남아 있었다.
“남궁정천(南宮正天)…?”
불규칙한 숨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남궁산산의 동생인 남궁정천이었다. 그는 전신이 흠뻑 젖어있었고, 한쪽 벽에 손을 박아놓고 비스듬히 기댄 채 혼절해 있었다.
“아는 자인가?”
백결이 석실에 들어서며 물었다.
“남궁가주의 막내아들인 남궁정천이오. 천마곡으로 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여기 와 있는지 모르겠소.”
담천의는 말을 하면서 벽에 박힌 남궁정천의 손을 빼내고는 부축해서 비스듬히 뉘어 놓았다. 상처가 심한 곳은 없었지만 숨결이 고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제가 있어 보였다.
“물에 빠져 질식한 것 같군.”
백결이 남궁정천의 상세를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그는 남궁정천의 등에 있는 몇 군데 혈도를 짚더니 배에 손을 대고 누르기 시작했다. 고개가 옆으로 돌려진 상태에서 남궁정천의 입에서 물이 토해지고 있었다.
“끄르륵---”
족히 두 사발이 넘을 듯한 물이 토해지자 남궁정천의 숨결이 조금 나아지고 있었다. 백결이 다시 몇 군데 혈도를 짚었다. 그러자 남궁정천의 입에서 트림이 나오는가 싶더니 힘겹게 눈이 떠졌다.
“입을 벌리게. 소림의 대환단처럼 기사회생의 명약은 아니더라도 임시처방 정도는 되는 속명단(續命丹)일세.”
백결은 품속에서 조그만 녹색병을 꺼내 그 안에 든 손톱 만한 단약을 남궁정천의 입에 넣어주었다.
“뉘신지는 모르나… 고맙소….”
급한 가운데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것을 보니 확실히 무림세가의 자식다웠다. 씁쓸한 단약을 녹여 목으로 넘기다가 시선 속에 담천의가 들어오자 눈에 반가운 기색을 떠올렸다.
“담형님 아니십니까? 컥… 소제가 잘못 본 것은 아니지요?”
말을 하는 바람에 침과 함께 넘어가던 속명단에 사래가 들린 듯 기침을 했다. 백결이 남궁정천을 부축해 상체를 세우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어찌된 일인가?”
담천의의 물음에 남궁정천은 문득 생각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형님…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야 하오.”
남궁정천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고,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괜찮네. 도대체 자네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괜찮은 곳이 아니오. 우리가 들어왔을 떼에는 물기 하나 없는 곳이었소. 헌데 갑자기 어디선가 폭우처럼 물이 쏟아지더니 이곳이 온통 물로 채워졌소. 그 뿐만이 아니오. 물살이 회오리치며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휩쓸리게 된 것이오. 버티기 위해 벽에 손을 박고 견디었는데….”
“우리라면 산산도 이곳에 왔단 말인가?”
“누님을 보지 못하셨소? 황보낭자는? 홍칠공(洪七公) 노선배도 보지 못하셨소?”
아마 남궁산산은 물론 황보옥(皇甫鈺)과 개방의 홍칠공 노육(盧陸)까지도 같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자네 뿐이었네.”
“우리는 천마곡으로 가는 도중에 개방의 홍칠공 노선배 일행을 만나게 되어 이쪽으로 오게 되었소. 이미 천마곡 입구가 막혀 있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서 그 분들과 합류했던 것이오.”
“모두 헤어진 건가?”
“입구에서부터 많은 분들이 죽었소. 가까스로 사십여 명 정도가 들어왔지만 기관에 의해 당한 분들도 꽤 되고 간혹 나타나 기습하는 금면구(金面具)를 쓴 자들의 무공도 괴이하여 몇 분이 당했소.”
“금면구를 쓴 자들….?”
“무서운 자들이었소. 경험이 노련한 분들도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을 알아보지 못했소.”
담천의 뿐 아니라 백결까지도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절대구마의 후인들일까? 하지만 백결이 알기로는 이 연동의 존재는 절대구마의 후인들에게 알리지 않은 터였다. 물론 그들이 천마곡에 머문 지 오래되어 연동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겠지만 대사형이라면 아무리 급해도 절대구마의 후인들을 연동에 투입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백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이 연동은 사제인 방백린에 의해 장악된 것일까? 대사형이 당한 것일까?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길을 찾아 천마곡으로 들어가야 했다. 대사형이 당한다면 나머지 사형제들은 기댈 곳이 없어진다. 아니 방백린에게 철저히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백결은 조급한 마음에 사방 네 곳에 뚫려진 입구를 살피러 이쪽저쪽을 거닐었다. 그것을 본 남궁정천이 급히 소리쳤다.
“자꾸 돌아다니지 마시오. 그러다가 무얼 건드렸는지 모르지만 물이 쏟아져 나왔단….”
그 말은 결국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천정과 위쪽 벽에서 맹렬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마치 폭포수처럼 세차게 뿜어지는 물줄기는 인간의 힘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 팔뚝 정도의 세찬 물줄기를 맞은 백결의 몸이 나뒹굴며 물살에 휩쓸리는 것이 보였다.
담천의는 갑자기 쏟아지는 물줄기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남궁정천을 잡아 자신이 들어 온 입구를 향해 던졌다. 다행히 물줄기를 피하고 남궁정천의 몸이 들어 온 입구 밖으로 던져진 것을 본 담천의는 재차 벽을 박차며 물살에 휩쓸리는 백결을 향해 몸을 날렸다.
“헉---!”
그는 등짝에 작렬하는 세찬 물줄기에 신음성을 밷으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충격이 느껴졌다. 이미 물은 가슴 위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더구나 이 좁은 공간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물살이 세차게 휘돌고 있었다. 그는 물살에 흔들리면서도 손을 뻗었다.
남궁정천의 말을 무시한 것이 실수였다.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빠져 나간 후에 남궁정천에게 물어보아도 될 일이었다. 하기야 그러는 동안 물줄기가 쏟아졌을지는 모르지만….
백결은 부상이 심해 정상이 아니다. 세찬 물살에 백결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자신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전월헌과의 승부에서 입은 외상은 일단 응급처치를 하였으나 문제는 막대한 공력을 소모했다는 점이었다.
내상은 입지 않았으나 연동으로 오기위해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달려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담천의가 수공에 능한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런 물살이라면 수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던 백결을 데리고 이 석실을 빠져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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