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지 못한들 어떠랴, 그것이 사랑일진대!"

영화평 모음집 <내 인생의 영화>를 읽고

등록 2006.01.20 21:24수정 2006.01.2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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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 인생의 영화> 책표지

<내 인생의 영화> 책표지 ⓒ 씨네21

마치 봄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포근한 저녁. 드라마 <겨울연가>에 삽입되었던 이루마의 'When The Love Falls'가 누선을 자극해 온다. 동생에게 악보를 건네며 한번 들려달라고 했는데, 그 파장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 여운으로 금세 마음은 부자가 되어 느긋하게 <내 인생의 영화>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제목이 시사하듯 각계각층의 인사들의 영화평을 엮은 책이었다. 영화평론가, 아나운서, 배우, 영화감독 등 모두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영화를 볼 때만은 자연인으로 돌아가 그들만의 진솔한 감상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몇 편을 골라보면 노희경, 유시민, 방은진의 영화평이다.


노희경이 추천했던 <바그다드 카페>나 방은진의 <남과 여>는 그저 귀동냥 정도 했을 뿐이고, 유시민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나도 감동적으로 본 영화였다. 이미 본 영화들은 내 감상과 비교해볼 수 있어서 좋았고, 보지 못했던 영화는 보고싶어졌다.

사람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과 각자의 위치에서 받아들이기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로 다가올 수 있는 거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다음은 유시민이 쓴 영화평의 일부분이다.

..결혼은 사랑의 느낌을 습관화된 일상으로 전환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다. 그런데도 사랑의 이름으로 하루라도 빨리 거기에 들어가려 안달하는, 그런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의 제안을 눈물로 거절한 프란체스카의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면서 내 모든 걸 다 바치고 싶어, 하지만 난 알아. 내가 당신을 따라나서면 우리의 사랑도 지금과는 달라질 거라는 걸."

… 잘났지만 많이 늙은 이스트우드와 예쁘진 않아도 매력 있는 메릴 스트립은, '사랑의 느낌'이 결혼이라는 제도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며, 그런 사랑은 아무리 짧은 것일지라도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과 최소한 같은 무게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사실 사랑은 짧은 것이라야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내가 고등학생이었거나 갓 스무 살을 넘겼을 무렵 본 영화였다. 그 때 내게 사랑은 환상 그 자체였다. 사랑의 이면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을지도 몰랐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영화를 보면서 둘이 함께 떠나지 않아서 매우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그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게 마냥 신기하다.


..남과 여, 그 긴밀한 만남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많은 이야기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어찌 보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관계임에도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거나 혹은 등진 채 울고 웃는다. 우리가 사랑 이야기에 천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그리워해야 하는 지독한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가지지 못한들 어떠랴, 그것이 사랑일진대!..

이상은 방은진이 쓴 영화평의 일부분이다. 이 영화를 떠올리면 첫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 누구에게나 그런 영화가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 영화뿐 아니라 어떤 유행가나 장소, 사물 등도 마찬가지. 사랑했던 이와 함께 공유했던 것이거나 누군가를 사랑할 때 혼자서 간직하거나 생각하고 느낀 것들….


모 스포츠지 기자와 인터뷰 중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저자는 '가질 수 없는 거요'라고, 오랜 침묵 끝에 대답했다고 한다. 질문부터가 정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저자의 대답은 내게 뼈 있는 슬픔으로 각인되고 만다.

<내 인생의 영화>는 하루 저녁에 읽을 수 있을 만큼 부담스럽지 않게 작은 분량이다. 게다가 여러 사람이 쓴 글을 짧게 엮어서 틈이 날 때마다 읽더라도 내용의 흐름이 흐트러질 염려가 없어서 좋다. 한 권의 책으로 여러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데에 매력이 있고, 좋은 영화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어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반가운 책이었다.

내 인생의 영화

박찬욱, 류승완, 추상미, 신경숙, 노희경 외 지음,
씨네21북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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