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국의 숨결어린 옛 산정늪(2)

연변 내 고향 여행(12)

등록 2006.01.23 17:35수정 2006.01.2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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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이르러 내 고향 연변에 널리 알려진 성자산성은 연길시 동쪽 10킬로미터 되는 기름창고 뒤면산이다. 말발굽모양으로 움푹하게 패여들며 산정평지를 이룬 산정에는 주위 산발을 따라 산성이 근 10리나 뻗었는데 지금도 돌로 구축된 옛 산성모습을 가끔 볼수있다.

옛 품위를 도드라지게 보여주는것은 기름창고 뒤산산정으로서 이곳에는 높이가 2미터도 넘고 길이가 10여미터나 뻗은 돌성벽이 그대로 드러나 등산객들과 답사자들을 반긴다. 이미 밭으로 되여버린 산성내 옛 궁터자리에 이르면 깨여진 기와쪼각들을 흔하게 볼수있는데 그만큼 역사 또한 유구하다.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니까 더욱 그러하다.


“연길시문물지”나 “연변문물간편”에 따르면 성자산성은 고구려시기에 구축되여 그후 발해, 요나라, 금나라시기를 거치여 온 것으로 알려진다. 금나라 말기에 금나라 통치계급내부의 모순이 격화되고 분화되면서 금나라 요동선무사 포선만노가 반기를 들면서 선종정우 3년, 즉 1215년 10월에 동경인 오늘의 요양에 대진(大眞)국을 세웠고 여진인의 옛지대로 옮겨앉으면서 국호를 “동하”라고 불렀다. 역사상 수명이 짧은 동하국의 출현인데 동하국 포선만노는 그의 행도남경(行都南京)을 성자산성에 두었다.

허나 동하국의 역사는 너무나도 짧았다. 기원 1223년에 흥기하던 몽고기병이 성자산성을 휩쓸면서 동하국은 패망의 고배를 마시면서 역사무대에서 사라져야 했다. 건국 19년만의 액운, 그때 동하국 수령 포선만노가 곧바로 성자산성에 머물러 있었다고 역사는 전하니 성자산성-동하국의 이 남경은 에누리없는 동하국의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다.

역사로 보는 동하국 그리고 성자산성의 유래라 하겠다. 아마도 그 시절에 이곳 산정의 인공늪은 동하국 궁녀들과 귀족들의 놀이터로 무척이나 활기를 띤것 같다. 이노인은 이곳 산 이름이 “위츠(鱼池)산”이라고 하는데 필자한테는 어떻게 보아도 물고기늪산으로 안겨들지 않았다. 다시 알아보니 “욕지산(浴池山)”이였다. 발음상 이해문제였으니 궁녀들의 목욕터로 자리잡히는 데는 어찌할수가 없었다.

우리 일행 몇몇은 옛 산정늪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동료 김삼 주필이 정성다해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그 시각 나의 가슴은 토끼를 품은듯 콩닥콩닥 뛰였다. 동하국의 옛 산정늪을 종내 찾고야 말았다는 기쁨의 발로였다.

이윽고 산행동아리들은 밭 북쪽 산등성이의 봉화대를 찾아보았다. 봉화대주변은 온통 낮다란 나무숲으로 둘러 쌓이였는데 꼭대기에는 깊숙한 구덩이가 패워있었다. 그 서슬에 돌로 쌓은 측면이 드러나 여기가 그 옛날 봉화대자리였음을 알려주고있었다. 동하국의 봉화대가 아닌 고구려시기의 봉화대일수도 있었지만 알수가 없었다.


봉화대 답사를 마치고 서쪽기슭으로 내리는데 서남쪽 언덕너머 연길시가 한눈에 안겨들었다. 그에 따른 연길분지며, 광흥골안, 부암골안이 발치에 펼쳐져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러니 이곳산정은 삼면이 크고작은 강으로 둘러 싸였는데 오늘날은 실개천에 지나지 않는 광흥골, 부암골이 그 옛날에는 나무숲사이로 제법 출렁이며 흐르는 강물이였을것이다. 연길시에 살면서 연길시와 도문시 구간의 이같은 다른 세계 모습을 처음 대한다는것이 그리도 반가울리가 없었다.

다시 산등성이 아래 원지로 돌아오니 더욱 희한한 정경이 발목을 잡았다. 산정의 대문가에 고구려 아니면 발해 혹은 동하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정자 기초돌들이 동그랗게 그대로 나타나 있었던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니 정자자리가 또 나타났는데 역시 동그란 원을 지은 상태였다. 그러니 완만한 서쪽 기슭을 따라 오르는 이곳 산정에는 엣 정자만 해도 눈에 띄우는것이 두곳으로 알려졌다.


산행동아리들은 흥분에 젖어들었다. 등산을 위한 등산만이 아닌 역사 문화답사로 이어졌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웃쪽켠의 평평한 정자자리에 점심밥곽을 풀어놓으니 우리 일행은 그제날 궁녀들이 노닐던 자리를 차지한 셈이였다. 동쪽을 보고 서쪽을 보아도 이곳 정자자리는 사방을 한눈에 굽어볼수있는 명당자리임이 력연했다. 옛사람들의 지리적 선택에 머리가 수그러졌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해 늦가을의 오후 한때, 늦가을의 단풍을 즐기는사이 나와 김삼 주필, 김수영 여사 셋은 다시 산정답사길에 나섰다. 산정의 과수밭을 질러 동쪽가로 나아가니 와—환성이 저절로 터져올랐다. 동쪽가는 깎아지른듯 경사도가 급한 산지대인데 성자산을 에돌아 하룡을 거쳐 마반산쪽으로 빠지는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합수물이 유유히 흐리며 거대한 영어자모 “U”를 만들어내니 환성이 터지지 않을수 없었다.

연길시 동쪽변두리에 개발되지 않고 세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같은 천하절경이 있다는것이 쉽사리 믿겨지질 않았다. 성자산에서도, 하룡쪽산에서도 느낄수 없고, 볼수없는 여기만의 대자연의 걸작이였다. 우리 셋은 바로 산과 산 사이를 따라 동북쪽으로 흐르던 강물이 산에 막혀 다시 서북쪽으로 굽이를 타며 우리쪽으로 다가서다가 이곳 산밑에서 또 굽이를 북동쪽 산사이로 돌리는 중심지대에 서고있으니 대자연의 신비에 한껏 들떠올랐다. 김삼주필은 과연 천하절경이라며 이곳을 관광코스로 잘 개발하면 좋겠다고 속셈을 터놓았다. 그날이 언제일가?! 기대가 가는 마음이였다.

아쉬운대로 자리를 옮겨 북쪽 산등성이의 봉화대를 다시 찾으니 첫 인상과 확연히 달랐다. 인공축조로 된 봉화대와 봉화대를 에돈 물도랑홈이 그대로 펼쳐졌다면 돌과 돌을 이어놓느라 직각으로 쪼아놓은 돌 한점까지 발견되여 수확이 대단했다.

흥분속에서 일행셋은 봉화대 서쪽 기슭 풀밭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김수영 여사의 청에 의해 풀밭에 누워 천고마비의 10월의 가을하늘에 눈을 주었는데 그 느낌이 전에없이 좋았다. 그러노라니 지난 여름의 막바지에 한패의 한국인들 안내차로 김수영씨, 이경호씨와 더불어 백두산 북쪽비탈과 서쪽비탈로 백두산 산정에 오르던 때가 생각났다. 그나날 도보로 북쪽비탈로 백두산정에 오를 때도 수영씨의 제의로 풀밭에 누워 푸르른 하늘을 감상한적이 있었는데 서서보기와 누워보기가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수영씨의 말이 피부로 느껴졌다. 대자연의 품속에 안긴다는 그 기분은 과연 별멋이였다.

어느덧 귀로에 올라야 했지만 연연한 이음산이 아닌 성자산에 이어 그 북쪽가에 또 외홀로 솟은 옛스러운 이곳 욕지산 산정이 전에 없이 정다이 안겨들었다. 흘러간 역사속에서도 그 위용을 잃지 않으려고 곳곳에 옛모습 드러낸 성스런 산이여서일가, 아니면 성자산성과 더불어 옛기운 서린 동하국의 숨결 깃들어서일가.

덧붙이는 글 | 리광인(리함) 기자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학술교류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리광인(리함) 기자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학술교류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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