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고이즈미에게 대단한 배신감 느끼고 있다"

지난해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밝혀... 놀란 부시 "그렇습니까?"

등록 2006.01.27 10:43수정 2006.01.2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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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11일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정상회담과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날 오찬장에서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에 대해 "대단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6월 11일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정상회담과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날 오찬장에서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에 대해 "대단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연합뉴스 김동진
"동북아 정세와 관련해서 부시 대통령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중요한 두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간의 최근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하였고 노 대통령은 우리 대일정책과 동북아 정세의 핵심사안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지난해 6월 11일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현지에서 브리핑하면서 밝힌 '동북아 정세'와 관련된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보다 훨씬 더 '진솔한' 대화를 나눈 것으로 확인됐다. 다음은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나눈 '동북아 정세' 관련 대화의 일부이다.

부시 대통령 "일본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중국보다) 더 민감한 문제인 것 같은데요."(웃음)

노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고, 저도 대단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 "그렇습니까?"


부시 대통령의 '가벼운' 질문, 노 대통령의 '무거운' 대답


두 정상은 이날 오전 북핵 문제 및 '전략적 유연성'을 의제로 한 회담에 이어 '올드 팜 다이닝룸'(오찬장)으로 자리를 옮겨 '동북아 정세'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이때 부시 대통령이 한·일 관계에 대해 대해 묻자,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신사 참배 문제를 지칭하며 이렇게 불쾌감을 피력한 것으로 밝혀졌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26일 이와 관련해 "양국 정상은 먼저 한·중 관계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부시 대통령이 웃으면서 '(중국보다) 더 민감한 문제인 것 같은데, 일본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노 대통령이 정색을 하고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고, 저도 대단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부시 대통령이 놀랐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 한·미 정상회담에 참여한 청와대 관계자도 "부시 대통령은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인데 노 대통령이 정색을 하고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을 받자, 부시 대통령은 놀란 표정으로 '그렇습니까'라고 되물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외국 정상에 대한 이와 같은 직설적인 비판은 정상외교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와 관련,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는 "부시 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와 매우 가까운 사이임을 잘 아는 노 대통령이 일부러 고이즈미 총리의 귀에 들어가라고 한 얘기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고이즈미 총리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돌아온지 1주일여만인 6월 20일 청와대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따라서 한·일 정상회담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한 발언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청와대 "일부러 부시와 가까운 고이즈미 총리 귀에 들어가라고 한 얘기"

이들이 전한 회담 분위기와 발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노 대통령은 먼저 "과거사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해 함께 간다는 의미에서 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과 파트너십 선언을 채택한 바 있다"면서 "그러나 일본은 약속을 배반하는 행위를 했고 한국의 아픈 곳을 너무 심하게 건드렸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과 전쟁을 신성화하고 있고 모든 침략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면서 "일본 파시즘은 천황에 대한 숭배이기도 했다"고 말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직접 겨냥해 비판했다.

한번 물꼬가 트인 노 대통령의 말문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이어 상기된 표정으로 "일본 사람들이 문제라기보다는 일부 정치 세력들이 국수주의적 경향을 부추기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흥분을 가라앉힌 노 대통령은 "한국이 일본에게 요구하는 것은 과거를 미화하지 말라는 것이며 신사 참배, 역사 왜곡, 그리고 러일전쟁으로 침탈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고이즈미 총리와 이런 문제에 대해 이렇게 열렬하게 논의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예의를 갖추며 얘기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노 대통령은 "아주 부드럽게 얘기했다"고 전제하고 "고이즈미 총리와 저는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역사를 배웠고 따라서 인식도 다르다"면서 "일본은 아직도 천황을 숭배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부시 대통령은 "일본이 한국과 좋은 관계를 갖기 바란다"면서 "한·미와 한·중·일 관계가 모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시는 이어 "미군 주둔이 그런 면에서도 중요하다고 본다"면서 "강대국화와 주변국에 대한 야욕은 일부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경향이기 때문에 미군 주둔은 개별국가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의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일 두 정상, 여정히 '팽팽'

노무현 대통령은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고이즈미 총리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돌아온지 1주일여만인 6월 20일 청와대에서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고이즈미 총리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돌아온지 1주일여만인 6월 20일 청와대에서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오마이뉴스 김당
한·미 정상회담에서 오간 노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부시 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전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다만,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24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미국 정부와 의회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우려한다는 야당측 지적에 "부시 대통령이 야스쿠니 참배를 비판한 일은 한번도 없다"면서 "미국은 내 참배의 진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노 대통령은 그 다음날(25일) 가진 신년기자회견에서 '대국적인 견지에서 노 대통령이 먼저 (고이즈미 총리에게) 손을 내밀 의사가 없느냐'는 일본 기자의 질문에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도록 여러가지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두 정상의 '원칙' 고수와 '신경전'으로 한·일 간의 외교적 냉각기는 장기화될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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