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조어도를 최초 발견했는가?

[중-일, 패권경쟁 달아오른다 15] 조어도, 어느 나라 땅인가? 2편

등록 2006.01.27 14:48수정 2006.01.2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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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나해상에 있는 조어도의 영유권이 어느 국가에게 있는지를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분쟁의 원인이 된 객관적 사실관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 사건의 발단이 된 19세기말의 상황을 간략히 검토하기로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편전쟁(1840년)을 계기로 중국 주도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동요하였고, 1860년대 이후로는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침탈이 한층 강화되었으며, 1871년 이후부터는 일본까지 서구열강의 대열에 가세하기 시작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물결 속에서,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탈아외교(脫亞外交)를 통해 서구식 방법으로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침탈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전에 여러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74년 대만 침공-1875년 운요호사건-1879년 오키나와(당시 명칭은 유구) 합병 등은 일본이 '서양인의 옷을 입은 동양인'로서 감행한 제국주의적 해외 침략이었다.

바로 이 시기인 1884년에 조어도 분쟁의 발단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문제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한 곳은 동지나해상의 대만 인근에 있는 작은 섬 조어도였다. 1884년에 일본인이 대만 북동쪽 190km 지점에 있는 작은 무인도인 조어도에 '최초'로 상륙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최초'라는 표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최초'가 세계 최초인지 여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세계 최초라면 조어도는 일본 영역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이 세계 최초가 아닌 '일본 최초'라면 조어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점유는 그 타당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에서는 위의 '최초'를 '일본 최초'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해 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세계 최초 여부는 향후 더 많은 연구와 논의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1884년에 일본인이 조어도에 '최초'로 상륙했다"고 했는데, 아마 일본인들은 '상륙'이라는 표현에 대해 불쾌감을 가질지 모른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그것을 '발견'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가 최초로 조어도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는지가 아직 명확히 판가름 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이 조어도를 '발견'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일본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제3자인 우리에게는 공평하지 못한 태도가 될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이 1884년에 적어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어도에 상륙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5년부터 일본정부는 조어도에 대한 측량과 조사를 반복적으로 행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일본 내각은 1895년 1월 14일에 조어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키는 결의를 채택했다.


판단의 근거는, (1)조어도는 무인도라는 점과 (2)조어도에 대한 중국정부의 통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내각 결의를 바탕으로 일본은 조어도에 표지판을 세우는 등 영토 굳히기에 들어갔다.

이러한 사실관계를 기초로, 일본은 자국이 조어도를 '발견'했고 또 실효적 점유를 시작하였으므로, 조어도에 대한 일본의 선점(先占)이 국제법적 근거를 갖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19세기에 동아시아에 처음 들어온 서양 국제법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 서양 국제법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척도는 아니지만, 서양 국제법의 측면에서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16세기나 17세기까지만 해도, 서양 국제사회에서는 '발견'만으로 선점을 인정했다. 다시 말하면, 발견 후에 실효적 지배를 하지 않아도 발견 그 자체만으로 영유권을 인정해 준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에 그로티우스학파 국제법학자인 스위스의 바텔(Emerich de Vattel, 1714~1767년)이 "발견과 실효적 점유가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오늘날에는 <발견+실효적 점유>를 선점의 전제로 인정하고 있다.

미국과 네덜란드 간에 팔마스섬의 영유권을 놓고 1928년에 벌어진 국제분쟁에서, 상설중재법원(PCA)은 "발견 후에 실효적 지배가 수반되지 않으면 선점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네덜란드의 손을 들어준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일본 내각이 조어도 편입 결의를 한 시점이 어느 시기인가 하는 점이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동학농민전쟁(1894년)과 청일전쟁(1894년)이 벌어졌는데, 1895년 1월 당시 일본은 이미 두 전쟁에서 각각 동학군과 청나라 군대를 제압한 이후였다. 그러므로 일본이 어떠한 결의를 하든지 간에 국제사회가 이를 제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내각 결의가 나왔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처럼 주변국이 승복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일본이 조어도를 편입했기 때문에, 중국이 국력을 회복한 20세기 중후반부터 조어도에 대한 일본의 점유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조어도를 둘러싸고 중화인민공화국-일본-중화민국이 어떤 대립 양상을 보였는지는 3편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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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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