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에 비친 굳은 표정의 나를 만나다

[터키 이야기2] 아타튀르크 거리 카페에서 나르길레를 피우는 사람들

등록 2006.01.30 18:15수정 2006.02.16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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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아타튀르크 거리는 1층은 옷집, 카페 등으로 구성된 아케이트, 그 위층은 아파트로 구성된 우리 식으로 말하면 5층의 주상복합건물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거나 눈길 멈출 곳이 없었던 서울 풍경에 길들여졌다가, 낮은 건물, 툭 트인 하늘이 보이는 풍경은 편안하고 가슴 시리도록 고맙다. 이 거리에서는 늘 해가 지고 뜨는 모습이 보인다.

a 아타튀르크 파크 동상 뒤로 하루를 마감하는 해. 케말 파샤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사랑은 상상이 거리 곳곳에 스며있다.

아타튀르크 파크 동상 뒤로 하루를 마감하는 해. 케말 파샤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사랑은 상상이 거리 곳곳에 스며있다. ⓒ 이승열


a 5층의 낮은 건물들이 편안하게 배치되어 있다. 지중해의 도시 알제리의 거리 형태도 이곳 안탈랴와 유사성을 가졌다고 한다.

5층의 낮은 건물들이 편안하게 배치되어 있다. 지중해의 도시 알제리의 거리 형태도 이곳 안탈랴와 유사성을 가졌다고 한다. ⓒ 이승열

터키에서 '아타튀르크'는 더 이상 초대 대통령 개인을 뜻하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다. 공항, 거리, 공원, 광장에는 어김없이 '아타튀르크'란 이름이 붙어있다. '아타튀르크'란 성을 헌정 받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 아타(아버지), 튀르크(터키인)는 터키인의 아버지, 즉 국부(國父)라는 뜻이다.


아타튀르크 밤거리를 채운 것은 남자들뿐이다. 카페에 남자들만 모여 나르길레(물담배)를 피거나 맥주를 마시고 있다. 낮 시간 분위기 좋은 음식점을 꽉 채운 여자들뿐인 서울 근교 풍경을 잠시 떠올렸다. 중년의 여자들은 과일을 사거나 바삐 어딘가로 걷고 있다. 카페를 찾거나 카페에 앉은 여자들은 이방인이거나 젊은 여자뿐이다.

가게마다 넘쳐나는 오렌지와 사과는 서울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못생기고 때깔이 나지 않는다. 유전자 조작과 농약의 과도한 사용으로 과도하게 빛이 나는, 그것도 모자라 매끈하게 코팅된 서울의 사과에 비하면 이곳의 사과는 얼마나 소박한가. 거리에서 한 아름 봉투에 담은 채로 손으로 쓱쓱 닦아 껍질째 베어 물면 그만이다.

a 버거킹, 맥도날드에게 무자비하게 이 거리가 점령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버거킹, 맥도날드에게 무자비하게 이 거리가 점령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 이승열

노랑, 빨강의 맥도날드, 버거킹 간판도 거리에서 한 귀퉁이를 차지하긴 하나 아직 우리만큼은 아니다. 쇼윈도 속의 아동복을 입은 마네킹의 표정이 내겐 좀 괴기스럽다.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동양적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켜 표현했다고 생각하나보다.

살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예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예의상 코멘트를 던져야했던 사람들은 마지못해 '귀엽다'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예의를 다했었다. 한국인 평균보다 훨씬 더 납작한 코는 오랜 시간 내 열등감의 요인 중 하나였다. 남편과의 결혼을 쉽게 결정한 이유 중의 하나도 그의 칼날 같은 콧날이었다.

'저 정도면 합쳐져 중간은 나오겠지' 유전의 법칙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우매한 착각이었다. 강력한 유전인자를 지닌 내 납작코는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아이는 아빠의 작은 키에 엄마의 납작코, 나쁜 것만 물려받았다고 아주 불만이 많다. 주위 사람들은 나를 은밀히 유혹했다. '코만 조금 높이면 지금보다 백배쯤 예뻐 질 거라고' 까딱하면 넘어갈 뻔한 적도 있었다.


납작한 코에 작은 눈을 가진 나를 보고 이곳 터키 남자들은 진정 감탄하며 '뷰티풀 페이스'를 외쳤다. 그들은 나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대한민국 땅에서 사십 년이 넘는 세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외모에 대한 찬사를 이곳에서 듣다니…. 혹 코를 높이고 싶거나 쌍꺼풀 수술이 하고 싶거든 터키로 여행을 떠나길 바란다. 성형외과 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다 터키로의 여행이 수천 배쯤 더 유용하고 남은 생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 확신한다.

a 나르길레(물담배)를 피는 기구. 호리병 아래의 물이 담배의 필터 역할을 한다고 한다.

나르길레(물담배)를 피는 기구. 호리병 아래의 물이 담배의 필터 역할을 한다고 한다. ⓒ 이승열

a 왼쪽은 마실것, 오른쪽은 전부 나르길레의 종류이다. 내 상상력은 사과향, 체리향에서 멈추었다.

왼쪽은 마실것, 오른쪽은 전부 나르길레의 종류이다. 내 상상력은 사과향, 체리향에서 멈추었다. ⓒ 이승열

터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카페 한곳을 골라 우리들도 이 거리에 잠시 안착한다. 모두 나르길레(물담배)를 피우면서 체스를 두거나 게임에 몰두해 있다. 호기롭게 '비어'를 외치니 '이곳은 노알콜' 카페라고 한다. 나르길레의 뽀얀 연기가 가득 찬 몽환적 공간에서 술을 팔지 않음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조금씩 카페 안 풍경이 선명해지고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커플, 멋진 폼으로 나르길레를 피는 청년, 떼거지로 몰려와 자리 잡은 동양인을 바라보는 사람들, 창 밖에서 화톳불 피워 테이블로 전하는 종업원.

a 버스 안에서 본 퇴근길의 아타튀르크 거리. 횡단보도가 따로 없이 길을 건너는 곳이 횡단보도이다.

버스 안에서 본 퇴근길의 아타튀르크 거리. 횡단보도가 따로 없이 길을 건너는 곳이 횡단보도이다. ⓒ 이승열

a 한탕을 꿈꾸는 것은 인류 보편의 꿈인가보다. 길거리에서 복권을 긁고 있는 안탈랴 사람들

한탕을 꿈꾸는 것은 인류 보편의 꿈인가보다. 길거리에서 복권을 긁고 있는 안탈랴 사람들 ⓒ 이승열

터키 여행은 갑자기 결정되었다. 겨울이 시작되며 나는 평소보다 우울했고 그 우울의 정점에 남편이 있었다. 15년의 결혼 생활을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 진원이 되어 일상을 흔들곤 했다. 드러난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세상 어느 곳에도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난 지쳤고 휴식이 필요했다. 그 즈음 중국의 지인에게 온 메일 속에 터키 이야기가, 나르길레가 쓰여 있었다.

남편에게 여행을 이야기하면 자신이 데려다 줄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라고 언제나 말한다. 그는 내가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이름 이전에 인간이란 다른 이름으로 먼저 존재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 여행가고 싶어' 하고 조심스럽게 얘기하면 '어디, 언제'라고 묻지 않고 '안 돼'라고 먼저 대답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늘 엄마와 함께 떠났던 아이는 기꺼이 동의했고 시어머니는 아이를 돌봐주시겠다고 약속했다.

a 나르길레 부싯돌. 나르길레를 주문하면 거리에서 작은 접시에 불쏘시개를 담아다 준다.

나르길레 부싯돌. 나르길레를 주문하면 거리에서 작은 접시에 불쏘시개를 담아다 준다. ⓒ 이승열

a 나르길레를 피우며 게임에 열중한 안탈랴 젊은이들. 술은 팔지 않는다.

나르길레를 피우며 게임에 열중한 안탈랴 젊은이들. 술은 팔지 않는다. ⓒ 이승열

유리창 밖 거리에서 불을 피워 조그만 접시에 담아 나르길레 불쏘시개로 가져다준다. 커피향을 고르듯, 사람들은 사과향, 혹은 체리향의 나르길레를 고른다. 카페 안은 나르길레 연기로 사물의 경계가 불분명한데 담배 연기의 불쾌함이나 매캐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달콤하고 신비롭다. 나르길레 연기로 가득 찬 실내 공기가….

여행을 떠나기 전 터키에 가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길거리 카페에서 나르길레를 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볼거리를 찾아 바삐 움직이는 여행자가 아닌 잠시라도 그곳 사람의 마음이 되어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다. 나르길레는 내게 터키여행을 완성시킬 가장 중요한 소품이었다.

a 나르길레를 멋지게 피는 사람들. 나르길레 연기가 가득한 카페 공기는 놀랄만큼 향기로웠다.

나르길레를 멋지게 피는 사람들. 나르길레 연기가 가득한 카페 공기는 놀랄만큼 향기로웠다. ⓒ 이승열

결국 난 나르길레를 시키지 못했다. 에민의 가게에서 돌아오는 길 미리 답사까지 끝낸 카페에서조차 나는 함께 간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며 결국 차이를 시키고 말았다. '담배'로 표현된 내 안의 편견은, 우리 사회의 편견은 망령이 되어 여행지에서조차 날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도 아닌데, 주위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내 안의 자유롭지 못한 의식 때문에 11시간을 날아간 거리에서도 난 서울에서와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의식이 내 안에 고스란히 잠재되어 있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 편견의 잣대로 판단하고, 나와 다르면 그들은 비난하지는 않았는지, 그들이 틀렸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는지…. '괜찮아, 이것은 빵이나 맥주나 풍경처럼 여행지의 다른 경험일 뿐이야'라고 반복적으로 2시간이나 세뇌했음에도 결국 나는 나르길레를 주문하지 못한 채 카페 문을 나섰다. 불꽃이 어지러이 공중에서 날고 불꽃 너머 검은 유리창에 굳은 얼굴의 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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