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백남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고 백남준 선생과의 만남을 추억함

등록 2006.02.16 16:03수정 2006.02.1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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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 백남준 선생이 사인한 피아노 건반.

고 백남준 선생이 사인한 피아노 건반. ⓒ 임재광

'나는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들 내가 엄청난 콜렉터라도 되는 듯 오해하기 쉬우나 사실 나는 그렇게 고가의 작품을 소장할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백남준 퍼포먼스에 사용된 피아노의 건반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남준 작품 소장을 주장하는 것은 거장의 손길이 닿은 작은 유품 하나라도 소중히 하고픈 마음에서다. 사실 작품이라기보다는 백남준과 관련된 기념소품이라 해야 옳다. 이 소품을 갖게 된 사연은 이렇다.

1997년 11월 15일 뉴욕.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백남준 선생이 오랜만에 퍼포먼스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미술전공 한국인 유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나는 직장을 휴직하고 늦은 나이에 유학을 떠나 대학원에 다니는 중이었으나 미술월간지의 뉴욕통신원 프레스카드를 소지하고 각종 미술행사를 취재하여 기사를 보내고 있었다.

퍼포먼스의 제목은 '코요테 6', 요셉보이스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오른 백남준의 피아노 연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자신이 열여섯 살 때 작곡했다는 음악을 하염없이 연주했다. 마치 동요 '봉선화'를 연상하게 하는 구슬프고 촌스런 음악이었다. 아~ 아 하는 허밍으로 노래하며 연주하는데 중풍으로 입이 약간 돌아간 상태라서 한쪽 입으로 침이 줄줄 흘렀으나 개의치 않고 연주를 계속하였다.

배경 스크린에는 요셉보이스의 퍼포먼스 화면이 비춰지고 있었으며 중간에 소프라노 가수가 나와 입으로 뉴욕의 밤을 가르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었다.


연주가 끝난 후에는 조명이 꺼진 무대 한쪽에서 레이저 광선이 비쳐지고 백남준은 담배를 피우다 연기를 광선을 향해 내뿜자 연기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선생의 새로운 실험인 레이저 아트가 선을 보이는 자리였다.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의 밀레니엄 기념 백남준 특별전에서 발표된 레이저 작품의 실험무대였던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부수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피아노를 파괴하는 행위는 백남준 퍼포먼스의 전형 중의 하나다. 수많은 피아노를 부숴온 선생이었지만 몸이 불편하니 선생이 미는 시늉을 하면 옆에서 공연 보조 인력들이 힘껏 밀어 쓰러뜨리고 일으키기를 계속하였다. 그렇게 해서 피아노가 산산조각이 나고서야 공연이 끝났다.


공연이 끝나고 백남준이 퇴장한 후 관람객들이 벌떼처럼 대들어 피아노의 건반을 뜯어갔다. 나도 한 아름 뜯어 온 교포학생에게서 건반 하나를 얻었다.

뒤풀이는 소호에 있는 김양수씨의 커피숍 언타이틀드에서 열렸다. 유명한 프로당구 선수 자넷 리의 시범경기를 보았고 그 자리에서 백남준 선생과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공연에 사용됐던 피아노의 건반에 선생의 사인을 받았다. 건반을 내밀며 사인을 청하자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웃으며 하나하나 사인해 주었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여러 번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소호에 나가면 흑인 남자 간호사가 미는 휠체어를 타고 외출하는 선생을 보곤 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공손히 인사를 하면 응, 안녕~ 하면서 응답을 한다. 그러나 나에게 선생은 너무 높은 경외의 대상이었으므로 살갑게 대화를 시도하지 못했다.

선생은 겨울이면 날씨가 따뜻한 마이애미에서 지냈다. 98년 겨울 마이애미 아트페어를 보러 갔다가 아트페어의 특별전으로 꾸며진 백남준관을 취재하면서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이 보여주는 존경과 환호의 현장을 보면서 정말로 뿌듯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백남준 선생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앨범과 피아노 건반을 찾아보았다. 같이 찍은 사진과 피아노 건반을 보며 거장과의 짧았던 만남을 아쉽게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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