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 임경업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왕명으로 세운 '어제달천충렬사비'이고, 오른쪽이 부인인 전주 이씨(혹은 완산 이씨)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렬비(貞烈碑) 예요. 8.15광복절이나 6.25사변 같은 큰 일이 있는 때에는 이 비에서 땀이 흘러나온다고 하네요.권성권
남편과 아내는 본디 한 몸이라고 했던가. 임경업 장군의 부인 또한 장군 못지 않게 정말로 심지가 굳은 여인이었다. 임 장군이 청에 체포되어 압송 도중에 명나라로 망명하자, 청나라는 임장군 대신에 그의 아내를 감옥에 가두게 된다.
'전주 이씨(혹은 완산 이씨)'라는 것 밖에 달리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던 그녀는 그곳에 온갖 모욕과 심한 고문까지 받게 된다. 그런데도 임 장군이 어디로 갔는지,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 조선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발설하지 않았고, 그녀는 끝내 옥에서 자결하게 된다.
이에 조선에서는 숙종 23년에 임경업 장군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관직을 복관시켰고, '충민'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충주에 '충렬사'를 세워 제향했고, 부인인 전주 이씨에게도 정려를 명하였다. 영조 3년에는 임금이 직접 나서서 이곳을 '충렬사'라 불렀다. 더욱이 정조 때에는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를 세웠고, <충민공실기>를 책으로 내려 임경업 장군의 음덕을 찬양토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