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에 사람이 산다는 것 잊지 말아주세요”

미안한 이웃으로 다가온 총각

등록 2006.02.06 18:58수정 2006.02.0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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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래층에 사는 이웃에게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해 아이들이 열심히 약밥을 만들고 있다.

아래층에 사는 이웃에게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해 아이들이 열심히 약밥을 만들고 있다. ⓒ 김은주

방학을 보내는 아이들 먹이려고 약밥을 만들었다. 장날에 사둔 공주 밤을 듬뿍 넣어 만든 약밥이 모양은 그렇지만 맛은 시중에서 파는 약밥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따뜻하고 감칠맛이 있었다.


애들 먹이려고 약밥을 만들었는데 만들면서 이상하게 누구도 걸리고 누구도 걸리고 줄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그렇게 이웃에 다 돌리다가는 우리 애들은 맛도 못 볼 것 같아서 딱 한 집에만 주기로 했다. 아래층에 사는 총각이었다.

솔직히 그 총각 얼굴도 잘 모른다. 밖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그런 사이였다. 아침 일찍 집을 나가 밥 늦게 오는 총각과 마주치는 경우는 정말 드물고,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더라도 남녀가 유별하니 서로 외면하면서 각자 갈 길 가기 바빴다. 그래서 아래층에 총각이 산다는 것만 알 뿐 누군지는 몰랐다.

분명 누군가 사는 것은 확실하지만 관계가 없고, 또 혼자 사는 총각은 소음도 일으키지 않고 그 집은 밤이고 낮이고 고요했다. 유령처럼 전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으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는 그런 이웃이었다.

익명에서 오는 자유라고 할까,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히려 걸리는 것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안 자고 돌아다녀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고, 나 또한 아래층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물 내리고 싶으면 한밤중이라 해서 꺼릴 것 없이 마음껏 내렸고, 밤늦게 세탁기를 돌린 적도 있었다. 정말 아래층에 약간의 배려도 않은 채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에서 지켜야 할 예의는 조금도 지키지 않고 살았다.

나의 이런 오만한 자유는 익명에서 오는 편함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아래층에 총각이 살아서 약간 방심한 측면도 있다. 왜냐면 총각들은 대체로 웬만한 일 가지고는 까다롭게 굴지 않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총각이 얼마 전 드디어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다'는 사실을 자신을 무시한 내게 가르치기라도 하듯 밤에 전화를 해서 아래층에 자기가 살고 있음을 확인시킨 것이다.

저녁 먹은 그릇을 씻고 있는데 방에서 남편이 누군가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직장 사람하고 통화하는 것이겠지 짐작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마늘 빻고 있…" 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때 '아차' 싶었다. 절구에 마늘을 빻느라고 '쿵쿵'거린 소리 때문에 아랫집에서 관리실에 연락해 관리실에서 전화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설거지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통화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관리실은 아닌 것 같고 아랫집 총각이 직접 전화한 것 같았다. 대략 짐작은 했지만 전화 통화를 마친 남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누구야?"
"아랫집인데 계속 '쿵쿵' 소리가 나서 무슨 일인지 전화했데. 이런 건 낮에 하지 왜 밤에 해?"

시골에서 어머님이 마늘을 보내 주셨는데 한 바구니나 되는 것을 실온에서 보관했다가는 썩거나 싹이 나올 것 같아 냉동실에 보관해 두고두고 먹으려고 아이들을 시켜 절구에 찧고 있던 참이었다. 남편 말처럼 총각이 직장 나가고 아래층에 아무도 없을 때 했으면 좋았는데 총각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기에 낮이든 밤이든 신경 안 쓰고 찧고 있었던 것이다.

a 작은 애가 만든 자칭 '토끼 약밥'

작은 애가 만든 자칭 '토끼 약밥' ⓒ 김은주

전화를 받은 후 얼마간 우리 가족은 유리 위를 걸어다니듯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밤에 아이들이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거나 하면 질색을 하면서 주의 시켰고, 텔레비전 볼륨도 되도록 작게 했다. 정말 며칠간은 조심조심 다녔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니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총각의 전화를 받은 후 확실하게 한 가지는 변했다. 무언가 맛있는 걸 만들게 되면 총각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총각이 전화로 자기가 아래층에 살고 있음을 알린 후 총각을 아래층에 사는 이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미안한 이웃. 그 미안함을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게 되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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