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신부여, 내 사랑 어서 오라

봄, 그대가 한낱 신기루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등록 2006.02.07 11:15수정 2006.02.0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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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얼음장 사이로 봄맞이 나들이 나온 청둥오리

얼음장 사이로 봄맞이 나들이 나온 청둥오리 ⓒ sigoli 고향

새봄을 맞이하는 남다른 각오


설이 지났다. 이제 본격 병술년 개띠 해다. 음력으로도 진짜 새해가 시작되었다. 1월 한 달은 새해를 맞고, 1년 계획을 세우느라 바빴다. 시방 우린 우왕좌왕했던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작심삼일의 연속에다가 아직도 음력에 자신의 생체리듬을 맞춰온 사람들도 이젠 여지없이 '새해는…' '새해가 되면…' 다음에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진짜 달라질 거니까 지켜봐' 달라는 변명을 더 이상 늘어놓을 수 없도록 거짓 없는 새해가 밝았다. 음양 모두 진실한 새해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으라고 종용한다.

매년 언론에서 양력 1월 1일에 한복을 입고, 또 한번 명절이라고 한 달이나 며칠 더 지나 설을 맞아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하니 이건 도통 어디에 장단을 맞춰 춤을 춰야할지 헷갈린다.

그래, 긴긴 한 달 동안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입으로 복을 파는 인심까지야 나무랄 순 없지만 뒤집어보면 이 한 달이 남은 1년, 11개월을 어떻게 보낼까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간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긴요한 시간이다.

계획을 세우고 수정하여 연마하는 계기로 삼으면 이보다 나을 게 없겠지만 자칫 연말분위기에 휩싸였다가 신년회다, 세밑이다, 설밑 맞이하느라 한 달을 허투루 낭비한다면 어느새 1년 중 1/12는 허송하고 만다. 11/12밖에 남지 않았으니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1차 점검을 하지 않으면 1년을 살고도 알곡은 없고 죽정이만 가득한 한 해가 되지 말란 법 없겠다.


a 아들 솔강이가 늦겨울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 얼음 한 조각 따줬더니 볼이 빨개졌는데도 잘 빨아먹고 있다.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아들 솔강이가 늦겨울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 얼음 한 조각 따줬더니 볼이 빨개졌는데도 잘 빨아먹고 있다.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 sigoli 고향

이보다 더 시급한 게 있다. 과연 우린 지난 발자취를 가감 없이 도려낼 자세가 되어 있는가. 아직도 흔히 우리가 '올 겨울'이라고 하는 기간이 끝나지 않았다고 해서 케케묵은 지난해의 무거운 짐과 묵은 때를 털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또 다시 '봄이 오면 잘해보지 뭐' 늘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지는 않았는지 자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우리 정신을 흔들어 깨우는 절기인 입춘(立春)마저 떠나보냈으니 더 이상 궁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지난 한 해가 여느 해보다 힘겨웠다고 한다. 먹고 사는 데뿐만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응어리가 졌던 한 해였다. 내게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뜻밖의 일로 점철된 한해의 연속이었다.

'다사다난+∞'에 몇 제곱을 해도 분이 풀리지 않게 한없이 작아지게 했어도 어차피 우리에게서 멀어져갔으니 가버린 세월 아닌가. 이젠 훌훌 털고 새뜻한 기분으로 반전의 기회를 포착하지 않을 텐가.

a 청미래, 명감이 겨울 한설을 잘 이겨내고 있었다.

청미래, 명감이 겨울 한설을 잘 이겨내고 있었다. ⓒ sigoli 고향

봄은 꼭 남녘에서만 오지 않는다

대체 봄은 어디서 오는 걸까? 봄이 오는 징조는 무엇인가? 봄은 옷이 무거워 거추장스러워지면 단박에 우리 주위를 에워싼다. 벌써 봄은 창 밖에서 서성이고 있다. 봄소식이 넘쳐나는 이때 '대끼리'를 외치며 활기차고 활달하며 활동적인 상상을 해보자. 활력 넘치는 삶을 누릴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옷매무새를 고치자.

봄은 얼음장 밑에서 온다거나 남녘에서 밀려 올라온다고들 한다. 둘 다 맞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추위와 얼음은 저 먼 시베리아와 중강진에 묵직한 한기를 가득 품고 있다. 똬리를 튼 뱀보다 견고하다. 어제도 오늘도 북풍한설 몰아치며 마음 놓아 풀어졌던 우리를 다시 움츠러들게 한다.

남에서 제아무리 훈풍이 분들 빙하처럼 영원히 녹지 않고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면 쉬 봄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 마음에 단단히 빗장을 걸어놓아 반가이 맞을 자세를 갖추지 않는다면 날씨는 다소 온화할지 모르나 참된 봄은 멀었다. 초여름에도 태양이 줄어드는 남극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a 계곡이 풀리고 있다. 차츰 넓어지면 봄이다.

계곡이 풀리고 있다. 차츰 넓어지면 봄이다. ⓒ sigoli 고향

아직 봄은 멀었는가 싶게 며칠 전 2, 3일은 봄을 시샘하는 놈치고 올겨울 들어 가장 추웠다. 나오려던 봄 동무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땅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풀리려던 얼음은 다시 거미줄 뽑듯, 누에게 실을 잣듯 결정체를 이어 흐르던 물마저 꽁꽁 얼렸다.

허나 어쩌질 못하겠지.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 올 수도 없고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감히 누가, 어떤 명분으로 막는단 말인가. 우리의 봄은 더디 오지만 분명 오고 있다. 남녘에서 오고 북녘에서 온다.

하여도 꼭 남녘 꽃바람과 함께만 오지 않는다. 끄덕 없을 성싶던 북극성 꼭짓점 아래 수만 리 이녁 얼음장 속에서도 "똑!"하고 파문이 일었다. 툰드라를 깨우는 영롱한 소리다. 아! 마침내 한 점 아침 햇살 반짝일 찰나 수정처럼 빛나는 물방울이었다.

물과 섞인 석회석이 물기를 똑똑 떨어뜨려 종유석, 석순을 만들 때와 하등 다름없었다. 스멀스멀 소리 내지 않고 어린 아이가 침을 흘리며 곤한 잠에 빠진 듯 미끄러져서는 이웃에게 깨어나라 야단법석을 떤다. 땅 속에서, 얼음장 밑에서, 허허벌판 눈밭에서 촉발된 봄은 석양 붉은 빛에도 수줍게 웃고 있다.

a 두 형제가 무척 부러웠다. 혼자였다면 이분들과 합류해서 노닥거리고 싶었다. 구워도 먹고 매운탕도 끓이고 회무침 시큼하게 무쳐도 좋으련만.

두 형제가 무척 부러웠다. 혼자였다면 이분들과 합류해서 노닥거리고 싶었다. 구워도 먹고 매운탕도 끓이고 회무침 시큼하게 무쳐도 좋으련만. ⓒ sigoli 고향

이른 봄맞이를 위해 떠난 나들이

저 멀리에서 봄이 온다기에 대기하고만 있을 순 없다. 앉아 있기에 좀이 쑤신 고로 춘향이 이도령 맞는 기분으로 버선 채 마당으로 뛰어나가 얼싸안고 맞자. 덩실덩실 내 사랑아 흔들며 지축이 동하여 소스라치게 놀라 만물이 깨어나도록 다 함께 춤을 추자.

난 가까운 계곡으로 가마. 자, 나를 따르라. 옥천(玉泉)에 가는 길에 차창으로 내다보니 못내 아쉬운 듯 늦겨울의 추억을 건져 올리는 이가 있구나. 차에서 내려 갈대숲을 헤치고 다가갔다.

형제로 보이는 두 사람은 얼음이 살살 풀린 물길에서 한 사람은 장화를 신고 돌을 움직이고 동생은 족대를 들이댄다. 몇 마리 아니건만 왜 이리 눌러 앉고 싶도록 정겨운가. 지나가는 걸음 뒤로 물기를 쪽 빼낸 얼음이 조각조각 부서져 떠내려간다. 청둥오리도 자맥질을 힘껏 하여 물 속에서 뭔가를 건져 먹는다.

이 추운 날에도 누군가 움직이고 있음에 봄은 더 일찍 서두르는지도 모르겠다. 어림 반 푼어치도 안 되는 미동이지만 나에게는 큰 힘이 되어 전혀 싸늘한 감이 없다. 발길을 돌려 밭에 가보니 여전히 한겨울이다.

a 꽁꽁 언 눈밭에서 배추 세포기를 꺼내 이웃에게 한 포기 주고 두 포기를 가져와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노란 배추가 가을 맛을 풍겼다.

꽁꽁 언 눈밭에서 배추 세포기를 꺼내 이웃에게 한 포기 주고 두 포기를 가져와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노란 배추가 가을 맛을 풍겼다. ⓒ sigoli 고향

눈이 포근히 덮어줬으니 살며시 이는 바람에 속에서부터 눈이 녹으면 대지는 촉촉이 병아리 마냥 한 모금 마시고 깨어날 준비를 하리라. 봄이 오면 꺼내서 싸먹으려고 고이 묻어줬던 배추 세 포기를 꺼내 돌아오는 길이다.

계절의 길목에서 아이들도 섭섭하기는 한마음이다. 꽁꽁 언 냇가를 보자 썰매를 타잔다. 때를 놓치면 다음 해로 넘겨야 하지만 어른은 곤궁한 배부터 채우는 게 급선무다. 점심을 먹고 고기 한 근 뜨러 단골집으로 떠나는데 논에 물이 들어 땡땡 얼어 있다.

곧 돌아와 아이들 손잡고 논으로 들어갔다. 400평 쯤 되는 논에 얼마 전 내린 눈이 녹아서 고르게 얼음판을 만들어 놓았다. 뛰고 뒹굴고 엎드렸다 일어서서 춤을 춘다. 벌러덩 뒤로 나자빠져 뒤통수가 먼저 바닥에 닿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a 빙판에서 아이들 뒤를 쫓아다니며 사진 찍느라 바빴다. 역시 애들은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한다. 마냥 신이 났다.

빙판에서 아이들 뒤를 쫓아다니며 사진 찍느라 바빴다. 역시 애들은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한다. 마냥 신이 났다. ⓒ sigoli 고향

끌어주려는데 가만 두라고 한다. 30여 분 뛰어놀았을까 1시간도 안 되어 소화가 다 된 기분이다.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아이들은 추운 줄 모르고 하염없이 이 자리에서 즐길 태세다. 아까운 돈 들여 눈썰매장 갔다가 눈이 녹아서 아쉬웠던 한 때를 보냈던 게 말끔히 씻겨졌다.

덩달아 신이 났다. 즉석에서 아이들과 아내와 모처럼 빙판 위에 사진기를 놓고 한방 찍었다. 다음 겨울엔 꼭 썰매를 만들어주기로 다짐하고 이른 봄나들이를 끝마치려는데 아이들은 고드름을 먹자고 조른다.

오랜만에 나들이를 계획했으니 온 김에 뿌리를 뽑을 참이다. 산을 넘어 양평 옥천에서 다시 냇가로 가 아이들에게 얼음 두어 조각을 물려주니 쌀쌀한 날씨에도 맛있다며 잘도 먹는다.

a 여기, 이 자리 그대가 지나갔는가. 그대가 입으로 후욱 입김을 불어 녹여놓았는가 어서 봄 맞으라고?

여기, 이 자리 그대가 지나갔는가. 그대가 입으로 후욱 입김을 불어 녹여놓았는가 어서 봄 맞으라고? ⓒ sigoli 고향

오늘 밤 똑똑똑 문을 두들길 것만 같아

봄은 봄이다. 분명 봄이다. 기세등등하던 동장군 옷을 벗기려는 무수한 천사들이 합동으로 사랑을 퍼부어대니 저인들 똥배짱으로 버티고만 있을 수 없을 게다. 이게 우리들이 헌 것을 몰아내고 새것을 맞는 방식이다.

어제 오늘도 눈이 내린다. 눈이 오면 잠정 봄은 추위에게 그 자리를 빼앗겨 설레는 마음을 한동안 접어야 한다. 꼬깃꼬깃하지 않게 고이 접어서 아랫목에 일시 파묻어 두리라. 반드시 오고야말 우리들의 봄날, 화려한 꽃 잔치와 나물천지가 열릴 그날을 기다리며 서서히 몸풀기에 돌입해야겠다. 기지개를 켜리라.

이 밤에도 사랑하는 이가 집 앞에서 주저주저하며 저만치 가까이 다가와 똑똑똑 두들길 것만 같다. 기다림에 지치기 전에 어서 오라 우리들의 봄이여. 내 신부여. 작정을 하고 긴 밤 지새도 아깝지 않을 계절아! 그대가 한낱 신기루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a 모처럼 나들이를 나가 가족사진 한장 찍었다. 사람은 뒷전이고 얼음이 주인공 같다. 바닥에 엎드리니 나마저 기분이 좋았다.

모처럼 나들이를 나가 가족사진 한장 찍었다. 사람은 뒷전이고 얼음이 주인공 같다. 바닥에 엎드리니 나마저 기분이 좋았다. ⓒ sigoli 고향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고향신문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고 있으며 봄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고향신문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고 있으며 봄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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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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