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에 밀가루는 왜 뿌려?

졸업식 밀가루 뿌리기 이제 그만.

등록 2006.02.09 09:34수정 2006.02.0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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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8일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작은 아이 졸업식에 다녀왔습니다. 사고로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재수를 준비 중인 아들은 창피하다는 이유로 졸업식에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마치 고등학교 3년 기간을 대학을 가기 위한 과정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치열한 대입 경쟁에 들어가게 된 아들에게는 지나온 3년의 고교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엄마의 충고가 잘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시절 졸업식장은 언제나 눈물 바다 였답니다.
우리 시절 졸업식장은 언제나 눈물 바다 였답니다.김혜원
싫다는 아이를 달래서 졸업식장으로 보내 놓고 카메라와 꽃다발 등을 챙기다 보니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0년 2월이 떠오릅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몇몇 아이들이 대학진학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졸업식장 나타나지 않아 친구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했었지요.

차라리 대입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에 졸업식을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되면 대학 입학 당락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졸업생들의 풍경을 보지 않아도 될테니 말입니다.

강당과 교실에서 열린 졸업식은 27년 전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졸업생의 표정에는 조금의 슬픔도 아쉬움도 없었고 오직 즐겁고 행복해 만 보입니다.

교실에 설치된 텔레비전과 스피커를 통해 강당에서 진행되는 행사 내용이 방송되고 있었지만 아무도 방송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화면을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은 켜 있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교복을 입고 만나기 힘들어진 친구들과 사진을 찍거나 못 다했던 수다를 떠는 것에 몰두해 있는 아이들에게 졸업식 행사는 오히려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친구야 사랑한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친구야 사랑한다.김혜원
이윽고 졸업식의 마지막을 알리는 석별의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그래도 이쯤해서는 적어도 한두 명쯤 눈물을 흘리거나 눈시울을 적시는 아이들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며 교실 안을 들여다 봅니다.

하지만 숙연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제가 들은 올드랭사인 중에 가장 즐겁고 경쾌한 올드랭사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아이들 명랑 쾌활하게 이별의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은 썰물처럼 교실을 빠져 나가기 시작하던 순간 어디서 가져왔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 저기서 밀가루 폭탄이 터지기 시작하는것입니다.


"야야 피해..."
"어딜 도망가. 이리와."
"선배님 축하합니다."
"너 죽을래."
"너도 맞아봐라."

갑자기 시작된 밀가루 투척 소동 속에 놀란 것은 학부모들입니다. 뉴스나 신문에서 졸업식장에서 옷을 찓거나 밀가루를 투척하는 일들이 있다는 소릴 듣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모습 앞에서 웃어야 할지 나무라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었기 때문이지요.

밀가루를 뒤집어 쓰는것도 추억 이라지만.
밀가루를 뒤집어 쓰는것도 추억 이라지만.김혜원
몇몇 아이들은 밀가루도 모자라 계란세례까지 받았는지 계란노른자 자국이 교복 위에 선명합니다. 아들 역시 어느새 누군가에게 밀가루를 뒤집어 쓰고는 눈이 따갑고 쓰리다며 휴지를 찾습니다. 보다 못한 선생님도 웃으며 한마디 하고 지나가십니다.

"니들 튀김옷 입히냐? 계란 씌우고 밀가루 바르고 바로 튀기면 되겠네. 먹는 거 가지고 장난 치면 안 된다고 했지."
"네 죄송합니다. 오늘만 하고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밀가루를 뒤집어 쓴 아이, 밀가루를 피해 달아나는 아이, 비명을 지르는 아이... 졸업식은 이렇게 한판의 밀가루 판으로 끝났습니다.

졸업, 다시 시작을 의미하는 졸업식에서 흰 밀가루를 뒤집어쓰며 환호하는 아이들. 이들은 송사와 답사를 들으며 콧물에 눈물까지 흘리며 훌쩍거리던 엄마,아빠의 졸업식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니들 밀가루는 왜 뿌리고 그러니?'라는 엄마의 질문이 아이들한테 쌩뚱맞게 들리는 것처럼 '엄마는 졸업식에 왜 울었어요?'라는 생뚱맞은 질문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입시에서 벗어난 해방감도 좋고 교복과 단체라는 규정에서 놓여난 것을 축하하는 것도 좋지만 당장 다음날 밀가루와 계란에 범벅이 되어 있는 교실과 복도를 힘들게 청소해야 할 후배들을 생각해 주는 배려 깊은 선배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올해 선배들이 던지고 간 밀가루가 계란을 치우며 힘들어했던 후배라면 내년 졸업식장에서 밀가루 뿌리기는 하지 않겠지요. 졸업식장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빗나간 풍속 '밀가루 뿌리기' 이제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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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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