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을 꾸네? 내래 잊게 해주갔어!"

[리뷰·인터뷰 2] 연극 <그녀의 봄> 속에 흐드러진 욕망과 좌절, 그리고 희망

등록 2006.02.13 09:23수정 2006.02.1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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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녀의 봄>이 남북한 통일 이후 가상의 완충지대인 경제특구 '경도(經都)'를 중심으로 온갖 군상들의 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내 관심은 컸다. 실향민 부모를 둔 나로서는 작·연출을 맡은 김학선씨가 어떻게 이 어렵고 예민한 문제를 풀어나갈지 궁금했다.

또, <에쿠우스> 등의 연극을 통해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는 명성을 쌓고 있는 최광일씨가 게이 역할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대학로에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다

a 사진 왼쪽: 김철희(최원석 분)와 한기주(최광일 분). 가운데: 김철희의 옛사랑 리원석(채국희 분). 오른쪽: 김철희 역에 더블캐스팅된 신덕호씨.

사진 왼쪽: 김철희(최원석 분)와 한기주(최광일 분). 가운데: 김철희의 옛사랑 리원석(채국희 분). 오른쪽: 김철희 역에 더블캐스팅된 신덕호씨. ⓒ ㈜파임 커뮤니케이션즈

먼(?) 미래. 남북한 통일 선언 몇 년 후, 통일시범지역으로 만들어진 신경제특구 경도(항구 도시)에 자신들의 미래를 '봄빛(?)'으로 채색하기 위해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든다. 김철희(최원석, 신덕호 더블 캐스팅)는 체제의 붕괴와, 통일 이전에 변절한 채 남쪽에서 비참하게 숨져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하루하루 도박판에 목숨을 내놓은 채 살아간다. 러시안룰렛을 하며 그가 저 세상으로 보낸 사람들 숫자는 이미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어린 시절,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범인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경도에 온 한기주(최광일 분)는 김철희와 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는 허구한 날 악몽에 시달린다. 꿈을 꿀 때마다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방화범을 만난다.

김철희에게 복수를 갈구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것은 냉대뿐이다. 한기주가 게이라는 사실이 김철희를 못내 불편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김철희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사랑해온 여자 리원석이 같은 경도에 있다는 사실이 버겁다.

김철희: "나한테 이상하게 접근하면 죽여버리갔어."
한기주: "이상한 접근이 뭔데?"
김철희: "몸을 비빈다든지, 내 앞에서 옷을 벗는다든지."
한기주: "꿈 깨! 나 좋다는 사람 쌨어. 그리고 나 이래 봬도 눈 높아! 너한테 관심 없어."


리원석: "떠나십시오. 경도에 계속 있다가는 죽습네다."
김철희: "상관하지 말라우. 혹시…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거이네?"
리원석: "착각하지 마십시오. 동무와 함께 했던 추억, 다 잊었습네다. 자작나무 숲길을 걸으며 나눈 대화, 따뜻하기만 했던 동무의 너른 등, 다 잊었습네다(눈빛이 흔들리며)."


러시안룰렛과 게이, 엇나간 사랑... 쓸쓸한 인간군상


a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는 작·연출, 김학선(37)씨. 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기자로 활동하며 많은 영화에도 출연했던 그는 <장자의 점> <저 사람 무우당 같다> <춤추는 여자> <숭아 숭아 원숭아> 등 다수 작품을 직접 쓰고 연출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는 작·연출, 김학선(37)씨. 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기자로 활동하며 많은 영화에도 출연했던 그는 <장자의 점> <저 사람 무우당 같다> <춤추는 여자> <숭아 숭아 원숭아> 등 다수 작품을 직접 쓰고 연출했다. ⓒ 이동환

김학선: "연전에 <숭아 숭아 원숭아>라는 작품을 연출하면서 이 작품을 처음 구상했습니다. 북측 기예 원숭이가 남측 원숭이를 찾는 코믹 풍자극이었는데요. DMZ에서 지뢰를 밟고 죽는 내용입니다. 남과 북을 그린 많은 작품들이 왜 현재의 분단 상황만 그릴 수밖에 없을까, 종착역이 왜 DMZ여야만 할까 고민했지요. 또 하나, 우연히 우크라이나 관련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봤던 살풍경이 영 잊히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을 직접 쓰고 연출까지 맡은 김학선씨는 사실 연기자요, 작가, 연출가로서 이미 그 깜냥을 인정 받은 재주꾼이다. 수많은 영화와 연극에 출연했고 희곡 작가와 연출가로 명성을 쌓아 왔다. 그러나 일부 팬들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성우' 역을 맡았던 그를 더 기억한다. 어쨌거나, 우크라이나 관련 프로그램에서 그는 국내 모 전자회사의 휘황찬란한 대형 네온간판과 맞닥뜨린다.

김학선 : "너무 생경했어요. 우리나라에 있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대형 광고물이 제 가슴 한 구석을 옥죄었지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물론, 저만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통일이 되고, 남북완충지대가 생긴다면 그곳에서도, 저렇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과 사람들이 보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념에 착잡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그녀의 봄>을 쓰기 시작했지요."

연극 <그녀의 봄>에서 '그녀'는 물론 리원석(채국희 분)이다. 통일 이전, 북한에서 경호원으로 아니, 인간 병기로 자라난 리원석.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바로 김철희. 경도호텔의 대표 소지성(정승길 분)을 경호하게 된 리원석은 김철희가 경도에 살아 있음을 알게 되고 다시 휘몰아치는 격정과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통일의 충격과 세파에 휘달린 김철희의 얼음장 같은 가슴, 그 어느 한 구석도 옛 연인에게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김학선: "굳이 등장인물의 상징성을 얘기하자면, 러시안룰렛에 목숨을 거는 김철희는 핵무기(도박)를 통해 체제 수호라는 헛된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현재 북한 정권을 나타내고요. 잃어버린 기억 속 악몽을 지우고자 몸부림치는 한기주는 정체성을 상실한 채 물신자본주의라는 격랑에 휘도는 남한 사회의 씁쓸한 현상을 대변합니다. 물론, 제가 이 연극을 통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습니다만…."

김학선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즉, 소통 부재가 그의 관심사였단다. 21세기가 초고속정보화시대니 어쩌니 말들 하지만, 디지털이 발전할수록 피 끓는 인간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고독', 그 심연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가 이 작품의 화두였다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네 삶이 행복할까 하는 문제를 고민했다고 한다.

개성으로 승부하는 배우들, 캐스팅에 반하다

a 경도호텔을 손에 넣고자 하는 북한 폭력조직 청운회의 보스 조용길(사진 오른쪽, 윤상화 분). 위장 취업을 하기 위해 경도로 온 북한 출신 노동자 최길주(왼쪽 앞, 조주현 분). 청운회의 행동대장 마갑동(왼쪽 뒤, 김상천 분).

경도호텔을 손에 넣고자 하는 북한 폭력조직 청운회의 보스 조용길(사진 오른쪽, 윤상화 분). 위장 취업을 하기 위해 경도로 온 북한 출신 노동자 최길주(왼쪽 앞, 조주현 분). 청운회의 행동대장 마갑동(왼쪽 뒤, 김상천 분). ⓒ ㈜ 파임 커뮤니케이션즈

a 남한 출신으로 경도호텔의 사장인 소지성(왼쪽, 정승길 분). 몽환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비밀카지노 마담 M(조은영 분).

남한 출신으로 경도호텔의 사장인 소지성(왼쪽, 정승길 분). 몽환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비밀카지노 마담 M(조은영 분). ⓒ ㈜파임 커뮤니케이션즈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배우들의 식은땀까지 살피며 연극에 몰입했다. 연극 중반, 처음에 가졌던 의문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배경 전환을 이처럼 간결하게 처리할 수 있다니…, 신출한 연출력에 옅은 신음만이 새나올 뿐이었다. 잠깐 동안 "이거 지금 내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보고 있는 거 아냐?"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긴박감 넘치는 액션 장면 하나하나, 소극장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짜임새였다.

a 배우 최광일씨의 한기주 역할은 그야말로 '딱'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금 생뚱한데, 2001년에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선 굵은 연기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가 연기하는 인물이 게이가 아니라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며 외로워하는 우리 사회 '아무나'의 모습임을 눈치챌 수 있다.

배우 최광일씨의 한기주 역할은 그야말로 '딱'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금 생뚱한데, 2001년에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선 굵은 연기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가 연기하는 인물이 게이가 아니라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며 외로워하는 우리 사회 '아무나'의 모습임을 눈치챌 수 있다. ⓒ ㈜파임 커뮤니케이션즈

또 배우의 면면은 나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 사실 중년의 남자인 내가 극에 흥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오십 고개가 가까운 내가 웬만해서야 엉덩이 가벼운 들병이처럼 쉽게 속살을 보이겠는가?

하지만 단언해도 좋을 만큼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살아있었다. 소설가 임철우씨가 쓴, 분단 문제에서 파생된 폭력에 천착한 1988년 작품 <붉은 방>을 연극으로 접하면서 느꼈던 전율이 다시금 내 가슴노리를 파고들었다.

<붉은 방>에서 보았던, 광기와 폭력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사람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군상들의 절망 가득한 눈빛 속에 언뜻 스치던 '먼 희망'을 다시 보았다면 지나친 환상일까? 그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살아있어서다. 그것을 끄집어낸 연출자의 가쁜 호흡이 고맙기까지 하다.

결론 짓자면, 이 연극은 통일 이후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숨가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좌절할 수밖에 없는 욕망과 사랑, 그리고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이 끝난 뒤 연출가 김학선씨와 배우 최광일씨를 인터뷰하고 커피숍을 나서면서, 귓불을 제법 맵게 때리던 찬바람이 외려 시원하게 느껴진 까닭은 모든 연기자들이 고마워서다. 열정과 사력을 다해 절망의 색조와 다시 꿈꾸고픈 희망의 빛깔을 보여준 그들에게 두려움 없는 찬사를 감히 보낸다.

가상의 항구 도시 경도에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밤에도 눈부실 네온간판이 켜져 있다. 그 찬란한 환상의 불빛을 따라 절제하지 못한 욕망에 사로잡힌 부나비들의 거친 날개 소리가 요란하다. 간신히 뒤돌아 나오기는 했지만 나 역시, 멈추지 못하는 부나비의 쓸쓸한 날개 한 쪽은 아니었을까?

"게이, '동성애'가 아니라 '소통'의 코드"
배우 최광일(37)씨, 차 한 잔과 함께 나눈 일문일답

- 한기주라는 게이 역을 욕심냈다는데 그 이유는?
"연출가 김학선씨는 처음에 나를 김철희 역으로 점찍었던 모양이다. 대본을 읽어 보고 한기주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 스스로 갇힌 인간에 대한 연민? 연기 변신? 그럴 수도 있다."

- 사실 곰살맞고 애틋할 정도로 게이 역할이 딱 맞춤이라 좀 놀랐다. 안 그래도 요즘 '동성애 코드'의 상업적 이용이 어쩌고, 말들이 많은데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한기주를 동성애 코드로 바라본다면 잘못이다.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그 쓰라린 '고독'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한 '소통의 코드'로 그려진 경우다. 그러기에 부담감을 지울 수 있었다."

- 게이 캐릭터도 어찌 보면 '외로움'의 전형이다. 과학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데, 그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배우가 아닌, 인간 최광일의 생각을 듣고 싶다.
"어렵다. 뼈저리게 혼자 있어봐야 하지 않을까?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은 느낄 수 있으니까. 오히려 고독을 곱씹고 극복해내야 하지 않을까?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웃음)."

- 금년 향후 계획은? 한기주가, 아니 인간 최광일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그저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 특별한 계획은 없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가족이다. 특히 올해 열한 살 난 딸이 희망이요, 사랑이요, 내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다."

덧붙이는 글 | <그녀의 봄>
4월 9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공연 문의: 02-762-9190)

덧붙이는 글 <그녀의 봄>
4월 9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공연 문의: 02-762-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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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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