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창녀라서 쪼까 거시기허요?

[리뷰·인터뷰 1] 지방순회 앞둔 배우 양희경씨, 그리고 늙은 창녀의 노래

등록 2006.02.03 12:06수정 2006.02.1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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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송기원(60)씨가 마흔한 살 때, '뒷골목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여성잡지에 연재를 하며 전국을 떠돈 적이 있었다. 불혹을 넘기면서도 정체성을 찾지 못하던 무렵이라고 작가는 회상한다. 그때 목포의 '히빠리' 골목에서 만난 동갑내기 창녀 이야기를 썼다. 그 창녀를 통해 작가 자신이 얼마나 퇴폐적이고 어두운 정서 속에 함몰되었나 깨우쳤다고 한다. 이후 단편집 <인도로 간 예수>(1995)에 '늙은 창녀의 노래'라는 소설이 담겨졌다.

1995년 9월. 대학로에서 이 작품이 모노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배우 양희경씨가 혼신을 다한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매진사례를 거듭한 이 연극은 300여 일 동안 대학로에서만 6만여 명 관객을 동원했다. 이후 20여 개 도시를 순회하며 총 10만여 명의 심금을 울린 '늙은 창녀의 노래'가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이 글은, 관객몰이 속에 서울 공연을 마무리하고 지방순회를 앞둔, 늙은 창녀의 한 서린 독백을 감상한 소감이며 배우 양희경씨, 그리고 연출자 최성신씨와 나눈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나로서는 오랜만에, '살아가는 일'에 대한 성찰을 다시 한번 해볼 수 있는 계기였다. 연극 중간에 나는, 점잖은(?) 중년임에도 누가 보거나 말거나 꽤 많이 울었음을, 아직도 가슴 한 구석이 척척하고 꿉꿉함을 고백해야겠다.


손님 모냥 허한 맘을 채와주고 싶어라우

지난 1일(수) 저녁 일곱 시.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소극장' 앞은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로 북적였다. 연출자 최성신씨가 밖에 나와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해 12월 31일까지 한 달 반여 동안 '우림청담씨어터'에서 1차 공연을 마친 뒤, 다시 1월 5일부터 학전블루소극장에서 한 달여 내내 성공을 확인했음에도 연출자는 일일이 관객들의 사전 반응을 살피며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a 연출자 최성신씨

연출자 최성신씨 ⓒ 이동환

하기야 2월 5일(일)까지 대학로 공연을 마감하고 지방순회를 해야 하니 아직은 먼 여정이 남아 있는 터. 사실, 모노드라마(monodrama, 한 사람의 배우가 등장해 연기를 펼치는 연극)는 출연자가 많은 연극과는 분명 다르다. 오직 배우 한 사람의 역량과 그것을 끄집어내는 연출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배우는 많지만 모노드라마를 소화해낼 배우는 흔하지 않다. 나는, 젊은 연출자와 지천명을 넘긴 여배우가 어떻게 이 무대를 꾸려갈지 자못 궁금했다.


연출자 최성신씨는, 관객들이 연기 잘 하는 배우 양희경씨를 보고 갔다는 느낌보다 원작자가 만났던 그 늙은 창녀를 코앞에서 보고 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이라고 속내를 밝혔다. 그런 점에 연출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이윽고 무대가 어두워지자 꿈결같이, 늙은 창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손님을 부른다.


"손님. 들어가도 될게라우? 예, 그럼 실례하겄구만이라우."

조명이 들어오고, 부끄러울 것도 없는 늙은 창녀가 다소곳한 몸놀림으로 고무신을 벗자,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객석에 긴장감이 돌았다. 여자 나이 마흔 하나에 늙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류계에서는, 더구나 사창가에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니 늙었다고 할밖에. 그러나 창녀의 눈빛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바로 코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눈빛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병의 그것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섬광이 일었다.

"왜 하필이면 나같이 나이 묵은 여자를 찾는다요?"

a 꾸벅꾸벅 졸다가 한소끔 꾼 그런 꿈 같은디 그거이 이십년이랑께요.

꾸벅꾸벅 졸다가 한소끔 꾼 그런 꿈 같은디 그거이 이십년이랑께요. ⓒ (주) 파임커뮤니케이션즈

첫 눈에, 손님은 20여 년 동안 허구한 날 받던 그런 손님이 아니다. 뭔가 모를, 이런 데 발 디딜 것 같지 않은 품새다. 알 듯 모를 이끌림으로 여자는 손님과 소주잔을 나누며 지난 얘기를 끌어낸다. 한물 간 몸뚱이나마 탐하기 바쁜 여느 손님들과 분명히 다르다 보니 한풀이하듯 이바구 보따리가 맥없이 풀어진다. 꽃다운 나이에 송정리역에서 만난 '푼짱네다바이(납치사기꾼)'에게 처녀를 뺏기고 목포 사창가 속칭 '히빠리' 골목에 눌러앉게 된 사연이 마구 쏟아진다.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한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 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 오매, 이십 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땀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둥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양희경 :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사람 상대하는 일이죠. 20여 년이나 곰배팔, 째보, 문둥이까지 온갖 사람들을 몸뚱이 하나로 상대했던 여자예요. 손님들을 살붙이 같다고 너그럽게 품는 여자의 말은 인생을 달관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지요. 창녀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생각해보세요. 늙은 창녀가 아닌, 늙은 배우, 늙은 아내, 늙은 어머니, 늙은 무희…. 가난했던 시절, 우리 누이의 얘기요, 우리 이웃 여자의 얘기라고 봐주세요."

늙은 창녀의 넋두리는 끝이 없다. 그깟 술 몇 잔에 취하지는 않았을 터. 자신의 인생을 망친 남자와 살림 차린 이야기, 그리고 애 밴 이야기, 떠난 남자, 죽은 애를 낳고 실성한 이야기, 그리고 그 빈 자궁을 손님들이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는, 다소 섬뜩하면서도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저 밑바닥 여자의 처절한, 삶을 삭인 관조(觀照), 아! 나는 여자가 옷 보따리를 끌어안고 애면글면, "아가야!"를 읊조릴 때 울음을 삼키느라 숨이 막혔다.

양희경 : "1995년, 초연을 준비할 때였지요. 원작자 송기원 선생은 걱정이 많으셨던 모양이에요. TV를 통해 보인, 억척스러운 제 연기만 기억하셨던 듯싶어요. 연습을 지켜보신 뒤, 목포 히빠리 골목의 그 여자가 다시 앉아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셔서 제가 감읍했지요. 십 년만에 다시 공연을 한다고 하니까 첫날 와주셨어요. 지금이 더 좋다고 말씀하셔서 그저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지요."

연기가 아니었다. 나 역시, 히빠리 골목의 늙은 창녀가 내 무릎을 간질이며 첩첩히 쏟아내는 말을 받는 느낌이었다. 조금은 불편한 객석, 그 어느 곳에서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남 들을까 싶어 꿀꺽, 침 삼키는 소리는 눈물을 훔치는 소리요, 안 우는 척 하는 소리요, 원작자 송기원 선생이 그랬듯, 밑바닥 인생이라고만 생각한 늙은 창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우월감'이었다.

배우 양희경이 극중에서, 아니 늙은 창녀가 부르는 노래

a 꿈에, 참 많이도 고향을 봤지라우. 근디 꿈만 꾸면 꼭 고향은 봄이어라우. 나가 고향 떠나던 그때맹키로 말이어라우. 어지러운 거! 내 몸뚱아리 까득하게 하얀 망초꽃 흐드러지네.

꿈에, 참 많이도 고향을 봤지라우. 근디 꿈만 꾸면 꼭 고향은 봄이어라우. 나가 고향 떠나던 그때맹키로 말이어라우. 어지러운 거! 내 몸뚱아리 까득하게 하얀 망초꽃 흐드러지네. ⓒ (주) 파임커뮤니케이션즈

"꽃값 오천 원으로 손님이 나를 사면, 내 고향 들샘머리 복사꽃으로 나는 손님을 사요. 손님도 나도 잃어버린 거기…, 그렇지만 차마 죽어서라도 돌아갈 거기…, 오막살이 지붕 위에 저녁별 돋아나면 우리 함께 복사꽃으로 피어날 거기…."

양희경 : "십 년 전에 이 모노드라마를 처음 공연할 때는 저도 극중 인물과 비슷한 나이였지요. 송기원 선생이 그래요. 십 년 후에도, 나이 육십 따지지 말고 그때도 이 역할을 하라고요. 체력이 된다면 하고 싶어요. 하지만 욕심일지도 모르죠. 사람 일이라는 게 한치 앞도 모르는데 장담할 수 있나요?"

"스무 해 동안 아무 탈 없던 몸 파는 일이 피고름 엉기듯 피고름 엉기듯 몸 파는 일이, 낮은 숨결 같은 휘파람 같은 당신 때문에 어이없이 터져버리는 오늘밤 일이야 평생의 한 풀리듯 끝없이 유채꽃밭 속…."

양희경 : "송기원 선생이 이 작품을 두고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셨지요. 나이 오십 넘어 조금 이해가 되네요. 이 이야기는 늙은 창녀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지요. 모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자신들 삶 속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이를테면 부부 간에도 장맛 같은 우정으로 곰삭혀져야 하듯, 아름다운 꽃이 꼭 아름다운 곳에서만 피지 않는다는,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얘기지요."

"생각 같어서는 나가 가진 것을 다 드레서다도 뭐이냐, 손님 허한 디를 메꽈주고 잡소만, 그것도 맘뿐이제라우. 가진 거이라곤 썩은 몸뚱어리뿐임서 지 꼴은 모르고, 손님이 그렇게 허한 구석을 보잉께 언감생심으로 그런 맘도 안드요?"

양희경 : "극중 인물이 삶을 달관한 듯싶다고 얘기했는데, 아마도 제 생각에는 자기도 모르게 삶 속에서 알아진 깨달음,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사십대에 이 역할을 했을 때는 극중 인물을 안아주고 싶다, 불쌍하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오히려 지친 내가 안기고 싶다는 생뚱한 생각이 들지요."

연극이 끝나고, 배우 양희경씨는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들 앞에 섰다.

a 연극이 끝난 뒤, 피곤한 기색 없이 객석에 앉아 인터뷰에 응하며 웃어주는 양희경(53)씨. 극중에서 여덟 곡의 노래를 직접 부르는데, 눈 감고 듣자니 가슴노리가 아려온다.

연극이 끝난 뒤, 피곤한 기색 없이 객석에 앉아 인터뷰에 응하며 웃어주는 양희경(53)씨. 극중에서 여덟 곡의 노래를 직접 부르는데, 눈 감고 듣자니 가슴노리가 아려온다. ⓒ 이동환

"이 연극은 세대에 따라 와 닿는 게 다르답니다. 이십대가 느끼는 것과 사십대가 느끼는 것이 당연히 다르지요. 늙은 창녀를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 수 있다면 이십대는 아니겠죠? 십 년 전과 달라진 점은, 당시에는 여성관객이 거의 전부였는데 지금은 남성관객들도 많이 오신다는 사실이에요. 항상 고맙고…, 배우로서 이런 역을 맡을 수 있었다는 행운에 감사드립니다."

양희경씨는 소탈하게도, 연극이 끝나고 간신히 분장만 지운 모습으로 객석에 앉아 인터뷰에 응했다. 향후 계획을 묻자, 자신이 출연한 <울어도 좋습니까?>라는 영화가 개봉예정이며, 가능하다면 지방공연 마친 뒤 해외공연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내 진실한 바람일진대, 해외교포들 앞에서 이 공연이 꼭 성사되었으면 한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밑바닥 인생이지만 진심으로 타인을 품을 줄 알았던 늙은 창녀를, 외로운 우리 교포들도 만났으면 하고.

내 몸뚱어리를 스치고 지나간
그 많은 남자들이
단 한 남자로만 밝아오는
저 환장한 보름달….

덧붙이는 글 | 늙은 창녀의 지방순회 일정 :

2월 11일(토) 2회/12일(일) 1회 총 3회 마산 MBC홀
2월 18일(토) 2회/19일(일) 1회 총 3회 군포 문화예술회관 대극장
2월 25일(토) 2회/26일(일) 2회 총 4회 부산 문예회관 중극장
3월 10일(금) 2회/11일(토) 2회 총 4회 청주 충북대 개신문화관
3월 18일(토) 2회/19일(일) 2회 총 4회 대덕 과학문화센터
3월 25일(토) 2회/26일(일) 2회 총 4회 수원 청소년 문화센터
4월 _8일(토) 2회/_9일(일) 2회 총 4회 천안 문예회관

충주, 인천, 제주, 대구는 미정.

덧붙이는 글 늙은 창녀의 지방순회 일정 :

2월 11일(토) 2회/12일(일) 1회 총 3회 마산 MBC홀
2월 18일(토) 2회/19일(일) 1회 총 3회 군포 문화예술회관 대극장
2월 25일(토) 2회/26일(일) 2회 총 4회 부산 문예회관 중극장
3월 10일(금) 2회/11일(토) 2회 총 4회 청주 충북대 개신문화관
3월 18일(토) 2회/19일(일) 2회 총 4회 대덕 과학문화센터
3월 25일(토) 2회/26일(일) 2회 총 4회 수원 청소년 문화센터
4월 _8일(토) 2회/_9일(일) 2회 총 4회 천안 문예회관

충주, 인천, 제주, 대구는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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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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