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그 기묘한 강박증의 미학

[책의 향기] 필립 블롬의 <수집>

등록 2006.02.15 10:46수정 2006.02.1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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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은 인간의  현세적인 욕망과 소멸에의 공포를 드러내주는 현상이다.
<수집>은 인간의 현세적인 욕망과 소멸에의 공포를 드러내주는 현상이다.동녘
화려한 옷이나 새 신발, 오래된 책, 동전, 우표, 휴대폰 등. 대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수집은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취미활동 중 하나다.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 특정한 대상이나 물건에 대해 강렬한 수집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매번 새롭고 어려운 프라모델(플라스틱 모델)을 조립해서 완성품을 모아놓고 뿌듯해 하거나, 구하기 어려운 해외 성인잡지를 수집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던 친구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강렬한 소유욕을 바탕으로 하는 수집은, 종종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강박증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지나친 집착은 병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위험이 높다.


그럼 사람들은 왜 나이가 들어서도 종종 특정한 물건이나 대상에 그토록 애착을 보일까? 돈이나 보석처럼 금전적인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당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 그토록 애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필립 블롬의 책 <수집>은 일반인들에게 종종 독특하고 괴상한 취미로 인식되는 '수집'이라는 현상을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사례로서 접근한 책이다.

수집의 기원은 르네상스 시기

저자는 수집의 기원을 휴머니즘이 강조되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기에서 찾는다. 16세기는 전환의 시대였다. 세계관의 확장으로 신대륙과 대우주 같은 미지의 세계에서부터 우리 인체와 내면의 정신적 가치관에 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부의 축적과 지식의 확대는 대중이 보다 다양한 문화적 욕구에 눈을 뜨도록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종래 왕이나 귀족 같은 소수 특권계층만의 취미였던 수집 현상은,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확산되었다.

경제적으로 번창한 상업 도시일수록, 수집활동은 시민의 고유한 문화적 취향으로 보편화되었다. 이것은 어쩌면 당시 사치와 퇴폐미로 상징되는 사회상의 반영이기도 했다. 수집 현상의 종류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 지금 기준으론 '변태'라고 할만한 중세의 유골을 수집하던 사례도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수집은 현실적인 물욕을 기반으로 한다. 16세기 이후, 초기 자본주의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대중들의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내세를 바라보는 중세 기독교적 행복관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 바로 물질적 쾌락에 기초한 현실의 행복을 중시하는 풍조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세속의 물건 혹은 대상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이런 현상을 보여준다.


시와 문학, 예술이라는 것 자체도 따지고 보면 당장 지금의 현실에서 뚜렷한 용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문화라는 무형의 가치가 오히려 인간 내면에 고도의 지적 포만감을 안겨준다.

수집 현상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에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이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실용적인 용도를 넘어서 대상에 특별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며 지적 만족감을 안겨준다.


오늘날 수집은 보다 개인주의적이고 독특한 취향을 드러내는 '마니아' 문화로 표현되고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 혹은 남들이 미처 그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대상에 대한 소수의 애정을 바탕으로 한, 현대 키치(저속한 미술품, 일상 예술, 대중 패션 등을 상징)적인 수집문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어쩌면 수집 현상은 물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바로 그 물건을 상징으로 하여 정체성을 투영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이상하지만 즐거운 나르시시즘'의 과정이 아닐까.

수집 -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

필립 블롬 지음, 이민아 옮김,
동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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