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역시 또 하나의 속세인 것을

영월지역에 드리운 호족의 숨결(1)

등록 2006.02.19 09:11수정 2006.02.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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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차를 타고 수주면 법흥리 법흥사를 향했다. 우수를 하루 앞둔 날이라 그런지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제법 따뜻했다. 그래도 강은 여전히 얼어붙었고, 햇살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응달 길에는 눈이 얼음으로 변한 채 지나가는 차량을 조롱하고 있다. 강원도는 아직도 봄보다는 겨울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예전에 찾았던 법흥사 입구는 정겨운 산길이었는데, 이번에 찾은 법흥사 입구는 깔끔하게 포장된 주차장으로 변해버렸다. 징효대사 부도탑과 탑비를 보면서 신라 말기 9산 선문의 하나로 자리 잡은 이 절의 의미를 되새기기엔 현대식 주차장은 너무 격이 맞지 않았다. 예전의 울퉁불퉁한 산길의 정취가 문득 그립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모두 변하는데 이곳만 변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한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이리라. 주변 경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매표소 떡하니 지어놓고 입장료에 문화재 관람료를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스런 일이리라.

a 징효대사 부도탑

징효대사 부도탑 ⓒ 이기원

징효대사 부도탑과 탑비를 둘러보며 영월 지역의 옛 모습을 회상해보았다. 신라 말기 호족 세력과 연결되었던 선종, 당시의 선종 9산의 하나였던 흥녕선원지를 일으켰던 징효대사 부도탑비, 징효대사는 단지 선종 계통의 승려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선종과 호족의 연결이 이루어지던 당대의 일반적 모습과 마찬가지로 영월 일대를 장악하던 호족과 연결된 정치적 세력의 하나였을까.

a 징효대사 부도탑비

징효대사 부도탑비 ⓒ 이기원

영월의 흥월리에 남아 있다는 궁예가 성장했던 흥교사를 떠올린다면 영월 지역에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승려의 존재 가능성을 점쳐볼 수도 있다. 궁예의 야망을 채우기엔 영월 지역의 호족은 세력이 너무 약했던 것일까. 궁예는 원주 치악산의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게 된다.

나중에 궁예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해서 주천면, 수주면 일대를 점령했다. 수주면 일대의 법흥산성, 도원산성, 공기산성 등은 이 무렵 쌓은 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당시 이 일대를 지키기 위한 독자적 세력의 존재는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다.

a 요선정

요선정 ⓒ 이기원

그렇다면 수주면 일대를 장악했던 독자적 세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 찾는 법흥사 적멸보궁, 그리고 요선정 마애석불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법흥사 오르는 길목의 꿀맛 같은 물 한 모금이 올라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오르는 길목의 양 옆으로 높이 솟은 소나무들이 잘 다듬으면 쓸 만한 건물의 마룻대며 대들보며 기둥이 될 만한 것이었다.

a 법흥사 오르는 길목의 소나무

법흥사 오르는 길목의 소나무 ⓒ 이기원

법흥사를 오르는 이들의 마음이 다 한결같지는 않으리라. 적멸보궁의 신성함에 의존해서 복을 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신라 말기 역사의 숨결을 찾는 이들도 있을 터이지만 법흥사를 둘러싼 사자산의 나무를 베어서 재목을 만들고 싶은 이들도 간혹 이 길을 오를 것이다. 그래서 법흥사 주지 스님에겐 이와 관련된 청탁이 많았다고 한다. 속세를 벗어난 산사라고는 하지만 어찌 속세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랴. 산사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정진하는 이들의 세상 역시 또 하나의 속세인 것을.


a 적멸보궁 가는 길

적멸보궁 가는 길 ⓒ 이기원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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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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