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이겨서 모 합니꺼?

[리뷰·인터뷰 3] 진솔한 웃음과 공감, 연극 <용띠 위에 개띠>

등록 2006.02.21 11:18수정 2006.02.2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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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란 과연 무엇일까. 자식 커가는 모습 보면서 함께 울다가 웃다가, 지지고 볶는 삶 속에 미운 정 고운 정 쌓여가는 동반자? 친구? 나는 개인적으로 부부란 결국, 서로에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친구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불십년이라고,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십 년을 못 버틴다는데 햇수로 10여 년 동안 식지 않는 열기로 장기공연을 하고 있는 연극이 있다. 바로 <용띠 위에 개띠>다. 대한민국 연극의 메카라는 대학로에서조차 경이로운 경우다. 부부이야기라니까 아내가 한사코 같이 가겠단다. 아프신 어머니도 "너만 좋은 데 다니지 말고 어멈도 바람 좀 쐬게 해줘라" 하신다. 지난 토요일(18일), 모처럼 아내와 함께 대학로 순방(?)에 나섰다.



결혼이란? 천국? 지옥?

a 배우로서도 그렇지만 이제 지천명을 넘기고서야 부부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배우 이도경(54)씨. 경상북도 경주가 고향인 그는, 포기하지 않는 열정으로 대학로의 신화를 일궈냈다.

배우로서도 그렇지만 이제 지천명을 넘기고서야 부부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배우 이도경(54)씨. 경상북도 경주가 고향인 그는, 포기하지 않는 열정으로 대학로의 신화를 일궈냈다. ⓒ 이동환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란다. 눈 맞아 황홀감에 빠져 겁 없이 한 결혼. 긴 세월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부부 간에도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고급(?)기술을 연마해 서로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용띠 위에 개띠>에는 단 두 명만 등장한다. 52년생 용띠 만화가 나용두(이도경 분)는 매사 빈틈없고 꼼꼼하며 세심한데다 소심하기까지 하다. 58년생 개띠 여기자 지견숙(백채연 분)은 남자보다 더 화통하고 대범하며 내숭 따위 모르는 성격이다. 어쨌든 두 남녀가 첫눈에 빠바박! 불꽃을 일으키며 반하고 결혼에 골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강한 경상도 사투리와 도치법으로 치환된 짧은 명사형 어법으로 '묵은지' 같은 부부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도경 : "부부란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요. 옛날에 '마당세실' 극장에서 <장터에 난리 났네>라는 연극을 공연할 때 아내를 만났습니다. 둘 다 집도 천호동이었지요. 제가 연극을 안 했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퇴근한 뒤 잠든 아내와 아이들 모습을 물끄러미, 하염없이 내려다 볼 때가 많아요. 우리 가족, 내 새끼, 내 아내…, 운명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될 듯싶네요."

꿈같은 신혼. 나용두와 지견숙은 행복에 겨워 요강에 거시기를 지릴 정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둘 사이는 연애시절에 장점으로 보였던 것들이 단점으로 부각되면서 삐걱거린다. 나용두는, 거칠 것 없이 화통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 지견숙과 결혼한 일이 자꾸 뜨악하다. 반면 지견숙은, 세심해서 좋았던 남편의 이런저런 부분들이 꽁생원처럼 느껴지면서 꼭뒤가 저릴 정도다. 서로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기 전에 싫어지고 지겨워지는 부분들.


a 아내의 발을, 남편의 발을 정성스레 닦아준 적이 과연 있는지…. 극을 통해 나용두와 지견숙은 끊임없이 관객에게 묻는다.

아내의 발을, 남편의 발을 정성스레 닦아준 적이 과연 있는지…. 극을 통해 나용두와 지견숙은 끊임없이 관객에게 묻는다. ⓒ 이랑씨어터

a 아내가 남편을 통해 웃을 수 있다면, 남편이 아내를 보며 웃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싶다.

아내가 남편을 통해 웃을 수 있다면, 남편이 아내를 보며 웃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싶다. ⓒ 이랑씨어터

a 돈 많이 못 벌어다 주려면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줘야지. 어떻게 하면 아내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을까? 내(이동환) 소원은, 죽을 때 아내 무릎 베고 이런저런 마지막 말 다 한 다음에 죽는 거다. 그러려면 아내가 도망 못 가게 옆에 꼭 붙들어 매(?)야 하는데 말이다.

돈 많이 못 벌어다 주려면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줘야지. 어떻게 하면 아내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을까? 내(이동환) 소원은, 죽을 때 아내 무릎 베고 이런저런 마지막 말 다 한 다음에 죽는 거다. 그러려면 아내가 도망 못 가게 옆에 꼭 붙들어 매(?)야 하는데 말이다. ⓒ 이랑씨어터

이도경 : "부부해로비법이요? 저도 아직 진행 중인데 답 내기가 그러네요. 늦장가 갔거든요. 서른넷에 아내를 만났어요. 얼마 전, 영화 <사생결단> 촬영 차 부산에 갔을 때 수십 년 만에 친구들을 만났지요. 부부동반으로 나온 친구들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데요. 부부사이 해로비결? '져주기'가 아닐까요? 저도 열심히 살지만 무탈하게 사는 친구들 보면 그런 모습이 보여요. 아내에게 져주는 마음씀씀이들. 사실, 아내 이겨서 뭐 합니까?"

나용두와 지견숙의 일상은 허구한 날 충돌 그 자체다. 나용두는 벌이는 사업마다 실패하고 지견숙은 사는 게 권태롭기만 하다. 어떤 부부라도 겪을 수밖에 없는 일들. 장면마다 보여주는 웃음 속에 덜커덩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네 사는 이야기다. 실컷 웃다가 문득, 지극히 평범한 부부이야기가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세간의 화제가 되고 여전히 관객들을 웃기고 울리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이도경 : "쉬운 얘기 속에 웃음과 공감, 그리고 잔잔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더구나 우리 시대 부부이야기잖아요. 사실, 배우도 모르고 관객도 모르는 연극은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번역극들은 연출자조차 작품분석을 제대로 못한 경우들이 있거든요. <심청전>이나 이 <용띠 위에 개띠>를 미국 무대에서 공연한다고 쳐요. 그들이 우리 정서를 제대로 이해할까요?"

연극은 그 시대 그 땅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일 때 배우와 관객 사이의 소통이 가장 원활하지 않겠냐며 이도경씨의 표정은 단호했다. 이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전에 그는 대학로 거리를 밤새워 거닐며 고민했다고 한다. 왜 연극인은 가난할까? 중장년층은 왜 연극을 멀리 할까? 우리 시대 관객들은 연극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을까?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관객들 마음속을 파고 들 수 있을까?

이도경 : "결국 세상살이라는 게 '바꿔먹기' 아닌가요? 이렇게 말하면 너무 상업적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지만요."

지난 1997년 8월 29일 첫 공연 이후 이도경씨는 거의 모든 열정을 이 연극에 쏟아 부었다. 지난 2000년에는 폐관 위기에 처한 '은행나무극장'을 인수해 지금의 '이랑씨어터'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장기 공연. <용띠 위에 개띠>는 이미 대학로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십여 년 동안 2500회를 넘겼고 소극장공연임에도 동원한 관객숫자만 26만여 명이다.

장기공연 비결은 오직 성실뿐

이도경 : "장기공연에 성공하면 B팀 C팀을 만들어 지방순회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지방을 돌지 못할 바에야 내키지 않았지요. 나용두라는 역할을 통해 저의 혼신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10년은 거뜬하지 않을까 싶은데…(웃음). 무리일까요? 그 이후에는 나용두 역할을 저보다 더 잘하는 후배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나용두 역에 관심이 많은 내가, 그러면 앞으로 십 년을 더 기다려야 내게 차례가 오냐고 묻자 이도경씨가 크게 웃는다. 어쨌거나, 이 연극의 성공비결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도경씨의 '성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고 이도경씨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나는 이도경씨가 녹록하지 않은 뚝심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강산이 한 번 바뀔 세월 동안 공연을 하지 못한 일은 딱 네 번뿐이다. 과로로 쓰러졌을 때, 정전으로 조명이 나갔을 때, 시위로 인한 교통통제로 지각했을 때, 그리고 2002년 월드컵 4강전 때다. 공연을 위해 그는 부모님 임종도 못 지켰고 여동생 장례식 때도 무대에서 관객들을 웃겼다. 대학로의 전설은 저절로 탄생한 게 아니었다.

a 정재영, 장서희 주연의 영화 <마이 캡틴 김대출>에서 이도경씨는 할배 역으로 나온다. 올 4월 개봉예정.

정재영, 장서희 주연의 영화 <마이 캡틴 김대출>에서 이도경씨는 할배 역으로 나온다. 올 4월 개봉예정. ⓒ 진인사필름

a 류승범, 황정민 주연의 영화 <사생결단>에서 이도경씨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냉혈인간 장철(마약상 두목) 역을 맡았다. 역시 올 4월 개봉예정.

류승범, 황정민 주연의 영화 <사생결단>에서 이도경씨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냉혈인간 장철(마약상 두목) 역을 맡았다. 역시 올 4월 개봉예정. ⓒ MK픽처스

지난 2003년에 개봉한 영화 <와일드 카드>에서 그는 흐느적거리는 안마시술소 사장 도상춘 역을 맡아 매스컴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이후 영화출연제의가 쏟아졌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도상춘과 같은 역할만 요구해서였다. 그런 그가 금년 4월에 개봉하는 영화 두 편에 출연 중이다. <마이 캡틴 김대출>에서 할배 역할로, <사생결단>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마약상 장철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이도경 : "<마이 캡틴 김대출>에서 할배 역은 단역이고요. <사생결단>에서 류승범씨의 두목으로 나오는 장철 역은 비중 있습니다. 항간에 이도경이는 웃길 줄밖에 모른다는 얘기들이 있어요. 이 영화 <사생결단>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걸요(웃음)? 꼭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라 응했습니다. 혼신을 다 쏟아 붓고 있으니까 기대해주세요."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숙연해지다

연극 마지막 부분. 아내 생일 선물로 대형냉장고를 해주고 싶었지만 돈이 없는 나용두는 냉장고 포장상자를 구해 그 속에 광대분장을 한 채 숨는다. 퇴근한 아내가 불을 켜자 한 눈에 들어오는, 천으로 가려진 대형냉장고와 남편이 써놓은 생일축하 글. 감동한 아내는 천을 걷어내고…, 포장상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어릿광대 남편. 연극 내내 티격태격 웃겼던 부부는 갑자기 할 말을 잊은 채 울컥한다. 우는 아내, 그리고 나용두가 던지는 말.

"미안해! 당신한테 해준 게…, 없어."

연극이 끝난 뒤 나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 같은 감동을 안은 채 아내 손을 잡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당신, 나용두 보면서 나한테 할 말 없수?"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당신한테 해준 게 없어."

"좀…, 진지할 수 없어요?"
"……?"

"왜 남자들은 꼭 해준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지? 누가 뭐 해달라나? 아내들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뭘 원하는데?"

"빠득빠득 마누라 이기려고 하지 말고 좀 져주란 말예요. 마누라 이겨서 대체 뭐 할 건데?"

덧붙이는 글 | <용띠 위에 개띠>는 금, 토, 일에만 공연됩니다.
공연문의 : 이랑씨어터 ☎ 02-766-1717

덧붙이는 글 <용띠 위에 개띠>는 금, 토, 일에만 공연됩니다.
공연문의 : 이랑씨어터 ☎ 02-766-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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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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