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치원은 '신병 훈련소'?

미국의 선행 학습 열풍

등록 2006.02.21 14:09수정 2006.02.2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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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미국의 유치원 수업 장면

미국의 유치원 수업 장면 ⓒ 최진숙

"내가 배워야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에서 로버트 풀검이 말하듯이 교육의 시작은 유치원이며 그 곳에서 인생에서 배워야 할 대부분을 배운다. 특히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자', '나누어 먹자' 등등 민주 시민이 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이제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유치원은 예의범절, 사회성 등만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유치원은 이미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위한 본격적인 학업이 시작되는 학교가 되어 버렸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동남부 한 소도시에서도 이러한 유치원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내가 알고 지내는 한 아이 엄마는 2003년에 다섯 살짜리 첫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다.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들었다.

"난 유치원이라면 놀이도 하고, 노래 부르고, 미술 정도 하는 줄 알았죠. 그런데 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보니, 그림 그리기보다는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거기다가 심지어 돈이나 시간, 숫자 개념도 배우고 있더군요. 이런 것은 본격적으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해야 배우는 것 아닌가요?"

또 다른 엄마는 다음과 같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유치원에 보냈더니 다른 애들은 이미 읽기 쓰기를 다 할 줄 아네요. 이제 읽기 쓰기를 미리 가르치지 않으면 유치원도 못 보내겠어요."

심지어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을 미리 배우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1학년이 치러야 할 공립학교 체계의 정규 학업 능력 평가 준비를 미리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력 수준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유치원을 일 년 더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아무리 '놀이' 중심의 유치원을 선호한다, 아직 공부만 하는 유치원은 보내기 싫다 한들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달리 선택이 없는 실정이다. 즉, 한국인들처럼 남들이 하는 선행 학습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소위 좋다는 유치원은 심지어 '면접'까지 치러야 입학이 가능하다. 일종의 아이큐 테스트를 거친 후 입학시키는 경우도 있다.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단시간에 유치원 과정을 미리 준비하기 위한 '유치원 예비 학습 캠프'(Kindergarten boot camp)까지 등장하였다.


여름 방학 동안 오락 활동을 명목으로 하지만, 사실 이 여름 캠프 동안 4-6세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들을 단기간 동안 예습한다. 이 캠프 선생님들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1학년 교사들.

a 유치원 준비를 위한 유치원 예비 학습 훈련소(Kindergarten boot camp) 광고

유치원 준비를 위한 유치원 예비 학습 훈련소(Kindergarten boot camp) 광고

동서를 막론하고 자녀 교육에 열을 내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미국의 선행 학습 바람 원인을 굳이 따져 보자면 부시 행정부가 2001년에 내놓은 "낙오 학생 방지법"(No Child Left Behind Act)의 영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책은 엘리트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학력 수준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정책에 의하면 시, 주립 학교 단위의 평가를 실시하여 일정 기준을 통과하면 학교에 보상이, 기준에서 현저히 떨어지면 제재가 가해진다. 심지어 최근 텍사스 휴스턴의 한 학교에서는 평균 점수가 높은 반 교사에게 상여금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여 교사들 간 위화감이 심화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가니 교사들은 학기말 고사 성적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시험을 위한 암기 위주의 학습을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유치원은 소위 초등학교 준비를 위한 '신병 훈련소'(boot camp)로 변하고, 부모들은 좋다고 소문난 유치원을 쫓아다니며, 어떤 아이들은 유치원 과정을 반복하는 경우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겠다는 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분명히 있다. 아이들의 발달 과정은 각자 차이가 나게 마련인데, 유치원이라는 훈련소에 보내어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수준의 아이로 맞추려는 것. 4-6세에 입학하는 유치원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정규 학교의 학업 능력 평가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미국 아이들, 한국 아이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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