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우정, 판때기 하나 때문에 깨졌다?

[공연리뷰] 남자들의 내면세계를 세밀하게 그린 연극 <아트>

등록 2006.03.02 13:27수정 2006.03.0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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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막강팀'으로 명명된 송승환, 정원중, 김일우의 공연 장면

'막강팀'으로 명명된 송승환, 정원중, 김일우의 공연 장면 ⓒ 악어컴퍼니

a 패기와 순발력으로 무장한 '열혈팀'의 오용, 김석훈, 이성민이 열연하는 모습

패기와 순발력으로 무장한 '열혈팀'의 오용, 김석훈, 이성민이 열연하는 모습 ⓒ 악어컴퍼니

기자가 요즘 가장 흥미롭게 지켜보는 TV 프로그램은 <해피투게더 프렌즈>라는 프로그램의 '반갑다 친구야'라는 코너다. 뻔한 드라마와 비슷비슷한 포맷의 연예인 짝짓기 프로그램, 게다가 방영예정인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이 채널 저 채널 반복해 출연하면서 뱉어내는 홍보발언이 주를 이루는 토크쇼에 질려있는 시청자들에게, 이 코너는 신선함과 함께 편안한 감동을 선사한다.

물론 약간의 연출과 설정은 있을지언정 어릴 적 친구를 찾아내는 과정과 그들이 십수 년 만에 만나 서로에게 쏟아내는 애정 어린 말들, 더불어 뒤풀이를 하면서 회포를 푸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낄 수 있다. 방송에 '반갑다 친구야'가 있다면, 연극계에는 <아트>라는 걸작이 존재한다.


다만 '반갑다 친구야'에서 오랜만에 만나 부둥켜안고 반가워하는 스타의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이 대리만족과 함께 희열을 느낀다면, 치졸하다 못해 '어떻게 남자가 저렇게까지 쪼잔해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연극 '아트'를 통해서는 배설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그만큼 <아트>의 내용은 독특하다.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왠지 창피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a 제작자에서 오랜만에 연기자로 무대에 선 '수현'역의 송승환

제작자에서 오랜만에 연기자로 무대에 선 '수현'역의 송승환 ⓒ 악어컴퍼니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 <아트>는 연출가 황재헌의 무대인사로 시작된다. 착하고 나름대로 귀여운 마스크의 연출가는 몇 가지 주의사항과 함께 약간의 선물을 객석에 투하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위트 넘치는 그의 진행솜씨에 벌써부터 연극에 대한 기대는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강남에서 잘 나가는 피부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수현은 꼼꼼한 성격에 모더니즘 예술에 관심이 많다. 그런 그가 흰 바탕에 하얀 선이 그려져 있는 누가 봐도 '이게 그림이야?'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작품을 1억8천이라는 고가에 사들이면서 극의 갈등은 시작되고, 수현이 애지중지하는 그 작품에 대해 '판때기'라고 말하는 규태의 대사에서 갈등은 정점을 이룬다.

수현을 이해 못하면서 한편으로 친구의 경제력을 배 아파하는 지방공대 교수인 규태와의 치사스럽고 옹졸한 감정대립에 만만한 친구 덕수가 끼어들게 된다. 단순하고 '좋은 게 좋을 뿐'이라는 문구점 대표 덕수는 둘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양쪽 비위를 모두 맞추려하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에게서 심한 욕을 먹게 된다.

a 예리하면서 꼼꼼한 '수현'의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 낸 배우 오용

예리하면서 꼼꼼한 '수현'의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 낸 배우 오용 ⓒ 악어컴퍼니

이 작품은 사회일반이 가지고 있는 평균적 사고에 일침을 가한다. '의리'로 대변되는 남자세계의 우정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라는 것처럼 치부하고 만다. 그림이라면 당연히 화폭 위에 가시적인 선과 구도가 존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강인하게 길러진 남자는 대범해야 하며 어지간한 일에는 친구를 헐뜯거나 조롱하지 않아야 한다는 통념까지도 무참히 깨뜨려 버린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싸움은 말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며, 결국 건드리지 않아야 할 부분 즉 상대 친구의 와이프 단점까지 들춰내며 서로를 잔인하게 짓밟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지루할 정도로 연극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이들의 싸움에 객석이 짜증스러울 수도 있겠다.

허나 프랑스의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의 탁월한 원작과 '작가의 의도를 절대 훼손하지 않은' 번안 덕분에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조차 없겠다. 연극은 시종일관 웃음으로 넘치고 관객들은 평소 알지 못했던 남자들의 심리세계에 푹 빠진 채 엔딩장면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극에 몰입하게 된다.


a 스타 연기자인 김석훈과 감칠맛 나는 조연배우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김일우가 극중 '규태'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스타 연기자인 김석훈과 감칠맛 나는 조연배우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김일우가 극중 '규태'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 악어컴퍼니

소극장의 매력은 연극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배우의 표정과 몸짓 하나에도 관객들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로 반응하고, 대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배우의 애드리브는 생생한 감동으로 보는 이들을 사로잡는다.

송승환과 정원중, 김일우가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한 '막강팀'은 팀 이름 그대로 연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자연스러움과 관록이 짙게 배어나오는 이들의 공연을 보고 있으면 '나는 저 세 친구 중 어떤 캐릭터를 가지고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특히나 많은 대사분량과 심하게 과장된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해 낸 '덕수'역의 정원중은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박수를 받는다.

a '연기란 이런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무대를 통해 제대로 보여준 '덕수'역의 정원중의 방백 장면

'연기란 이런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무대를 통해 제대로 보여준 '덕수'역의 정원중의 방백 장면 ⓒ 악어컴퍼니

이는 정원중이라는 배우의 타고난 연기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극중 덕수라는 인물이 연극적 연기의 묘미를 충분히 발산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점 또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배우들이 '아트'의 등장인물 중 유독 덕수 역할에 눈독을 들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타 연기자인 김석훈과 충무로 캐스팅 0순위라고 인정받는 오용과 이성민이 함께 열연한 '열혈팀'의 공연은 어떨까. 공연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탓인지, 아직은 관객들이 편안한 가운데 극 자체에 빠져들게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막강팀'의 출중한 연기가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면 그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열혈팀'에서 규태역을 맡은 김석훈은 긴장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극이 전개될수록 브라운관에서 봐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그의 연기는 점점 살아나는 듯했지만, 대사와는 달리 방백 부분에서는 어색함을 여전히 감추지 못해 그의 팬 관객들에게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가지게 한다.

a 열연하느라 침이 여러 번 입에서 흘러내려 관객들을 실소케 했던 극중 '덕수'역의 이성민. 그는 정원중과는 또다른 방법으로 캐릭터를 소화해 내 두 팀의 색다른 연기색깔을 맛보게 해줬다.

열연하느라 침이 여러 번 입에서 흘러내려 관객들을 실소케 했던 극중 '덕수'역의 이성민. 그는 정원중과는 또다른 방법으로 캐릭터를 소화해 내 두 팀의 색다른 연기색깔을 맛보게 해줬다. ⓒ 악어컴퍼니

'열혈팀'의 세 배우 중 가장 열연을 펼쳐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 낸 덕수역의 이성민에게서도 약간의 아쉬움은 느껴진다. 극중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내기 위한 배우 본인의 설정이었는지는 몰라도, '웃찾사'라는 개그프로그램의 개그맨에게서 느껴질 법한 모습이 중간중간 드러나 조금은 어색하게 비춰진 것이다.

그렇다고 '열혈팀'의 공연이 부족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젊은 배우들에게서 묻어나는 패기와 순발력에서 오는 애드리브로, '막강팀'에서 맛볼 수 없었던 색다른 재미와 기쁨을 관객들은 만끽할 수 있다. 극중 수현의 캐릭터와 오용의 마스크가 딱 맞아떨어진 것 또한 절묘한 캐스팅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는 점이다.

다만 '열혈팀'의 대사처리가 다소 매끄럽지 못하고 관객에게 대사에 쫒기는 듯한 느낌을 준 본질적인 이유는, 번안과 연출을 함께 한 황재헌의 변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연극 '아트'에서 연기자가 할 일은 인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우 자신을 해체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연기자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이려고 할 때 오히려 캐릭터는 억지스러워질 뿐 아니라, 그 상황까지도 부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극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해 보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야 하는 천형(天刑)이 '아트'를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지워졌다고나 할까.

a '열혈팀'의 공연을 보고 난 후 느낌을 말하고 있는 관객 김성겸(31· 도봉구 쌍문동)씨와 전혜정(27·서대문구 옥천동)씨. 이들은 세 배우 중 극중 덕수를 연기한 이성민씨의 열연이 인상깊었다며, 한편 김석훈씨도 처음엔 대사가 씹히기도 했지만 나름 만족스런 연기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열혈팀'의 공연을 보고 난 후 느낌을 말하고 있는 관객 김성겸(31· 도봉구 쌍문동)씨와 전혜정(27·서대문구 옥천동)씨. 이들은 세 배우 중 극중 덕수를 연기한 이성민씨의 열연이 인상깊었다며, 한편 김석훈씨도 처음엔 대사가 씹히기도 했지만 나름 만족스런 연기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 노정연

'반갑다 친구야'를 보면서 '나는 내 친구들에게 어떤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을까'란 의구심을 가졌던 이들은 이 연극을 꼭 볼 필요가 있다. 객석에 앉아 극중 인물들의 갈등이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며, 남자들 사이의 내밀한 우정도 확연히 다른 시각차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에서 위안을 삼으시라.

그리고 오랫동안 소원해졌던 친구에게 전화 한 통 걸어 오뎅국물에 정종 한 잔 기울이며, 두텁게만 느껴졌던 서로간의 오해와 앙금의 벽을 허물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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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고 대자연을 누리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평생 살다 제주에서 1년 반,포항에서 3년 반 동안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대자연 속에서 깊은 치유의 경험을 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소명으로 받은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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