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79회

등록 2006.03.02 08:36수정 2006.03.0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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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와…!"

후송노인이 급히 자신의 가슴에 광와노인을 부축하며 손으로 광와의 가슴에 대고 터져 나오는 피를 막으려 했다. 광와노인은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띠웠다.


"미안하네. 약속을 지키지 못했군."

"고약한 친구…… 애초부터 약속을 지킬 마음조차 가지지 않았던 것 아닌가?"

"자네도 보았지 않은가? 약속은 지키려 했네."

"저 아이와 같이 죽으려고 말인가?"

"컥…. 서두른 것은 사실이지만 노납이 패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네."


광와노인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내며 말했다. 어차피 소림의 산문을 나서면서 엉켜버린 삶이었다. 그래도 이만큼 살았으니 죽는다 해도 억울할 것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손에 묻힌 이 피는 죽어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광와!"


광와노인이 폭포수처럼 입에서 피를 토해내자 후송노인이 급히 몇 군데 지혈을 하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괜히 공력만 낭비할 것 없네. 크억--!."

또 다시 한 사발이나 되는 피를 밷아 낸 광와노인이 지치는 듯 고개를 옆으로 뉘였다.

"노납은 아마 팔열지옥을 거쳐 내생에는 축생(畜生)으로 환생할 걸세. 불가에 몸을 담아 전생의 업을 이승에서 풀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업만 쌓았으니…… 하지만 자네만큼은 노납을 욕하지 말게나. 당시의 결정에 대해서 아직까지 후회는 없네."

"이해하네."

광와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야 뻗었던 검을 내려뜨리는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자네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노납이 부탁한 것까지 저버리지는 말게."

"자넨 아직도 담명 장군을 잊지 못하고 있군."

"연(緣)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노납의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천동의 동주(洞主)가 자네를 탓하지는 않을 걸세. 노납이 그 동안 손에 묻혔던 피 값치고는 그리 비싼 것이 아닐세."

"알았네. 노도의 목숨을 걸고라도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겠네."

"고마우이. 컥---!"

대답을 하다말고 다시 또 기침을 하며 핏덩이를 토했다. 불그레했던 얼굴도 이제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광와노인은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게."

"아…아니네…… 노납을 바로 앉혀…… 주겠나?"

그 말에 후송노인은 광와노인의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후송노인은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광와노인을 부축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도록 도왔다. 광와노인은 양 손을 합장한 채 가부좌를 틀고 바로 앉았다. 이미 죽어가고 있던 그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자세를 취할 힘이 남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네…."

"그 동안 고마웠네. 자네 같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서 노납은 행복했네."

광와노인은 후송에게 진심어린 말을 전하며 시선을 돌려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이미 꺼져가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오히려 매우 편안해 보였다.

"자네가 생각하고, 자네가 행동하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말게. 또한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거나, 무림의 정의(正義)를 지키는 일이라는 따위의 허망한 대의에 억매이지도 말게. 자네는 그렇게 믿을지 몰라도 크게 보면 자네의 행동이 나라를 망치는 일이 될 수 있고, 악을 행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게나."

"………!"

받아들일 수 있는 충고는 아닐지라도, 그리고 그 진의를 모두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한 말일지라도 매우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었지만 어느새 광와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그 입은 열리지 않았고, 그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 광와노인이 바랬던 대로 좌화(坐化)였다.

---------------

새벽까지 먹은 술이 오후가 되도록 깨지 않았다. 속은 비었는데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헛구역질을 몇 번 하다가 결국 밖으로 나왔다.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지고 술이라면 두주불사하는 풍철한이지만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육양수(六陽手) 어른과 퍼마신 술은 그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정주의 손가장이라……)

강남 지방 특색의 오밀조밀한 정원은 약간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한 폭의 그림과 같이 푸근하고 조용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매우 좋은 곳이었다. 풍철한은 잉어 떼가 몰려다니는 얕은 연못 위의 난간에 걸터앉았다.

(무슨 관계지? 모용정(慕容姃)과 독접(毒蝶)이 이곳에서 도망쳐 무슨 까닭으로 손가장으로 스며든 것이지?)

모용정과 독접을 은밀히 뒤쫓았던 육양수 어른이 어제 오후 늦게 돌아와 전한 소식이었다. 사실 그녀들이 도망친 후 은밀하게 손가장으로 스며들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손가장의 누군가와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사실 손가장은 이상한 곳이 분명했다. 그곳의 식솔들은 매우 다양하고 잡다했다. 중원의 많은 문파들이 손가장에 은밀하게 정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하여간 우검(于劍)과 풍검(風劍)이 지켜보고 있으니 어디와 연관이 되었는지 밝혀지겠지.)

우검은 풍철한이 이끄는 개양대(開陽隊)의 수석조장(首席組長)이고 풍검은 삼조조장이다. 그들 능력이라면 조만간 만족할만한 정보를 가지고 올 것이다. 그 때였다. 미세하게 난간이 울리며 단사가 모습을 보였다.

"얼마나 드셨는지 술 냄새가 온 천지에 진동을 하는군요."

그녀의 손에는 사발을 놓인 쟁반이 들려있었는데 꿀물이라도 타 가지고 온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오라비 생각해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풍철한의 너스레에 단사는 눈을 샐쭉하며 꿀물이 든 사발을 건넸다.

"어디 다녀오셨대요?"

풍철한은 꿀물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빈 사발을 쟁반 위에 놓았다. 꿀물이 넘어가다가 목에 걸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입에 묻은 물기를 쓱 닦아내고는 딴청을 부렸다.

"누구 말이냐?"

"육양수 어른 말이에요."

뻔히 알면서 왜 시치미 떼고 있느냐는 표정이다.

"글쎄… 오랜 만에 친구 분을 만나러 다녀오셨다고는 하더구나."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풍철한을 보며 단사의 눈꼬리가 다시 치켜 올라갔다. 자신의 눈을 피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 풍철한을 보며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라버니…!"

"왜 또 그러냐? 발정난 암코양이 눈을 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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