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 고수관 선생을 아는가?

판소리계 거두 불구 고향에는 흔적없고 전설만 남아

등록 2006.03.06 19:05수정 2006.03.07 14:55
0
원고료로 응원
a 명창 고수관 기념사업 창립총회가 4일 고향인 고북면에서 열렸다.

명창 고수관 기념사업 창립총회가 4일 고향인 고북면에서 열렸다. ⓒ 안서순

'명창 고수관'을 기리자.

지난 4일 충남 서산시 고북면에서 '명창 고수관 선생 기념사업(위원장 김광조) 창립총회가 열렸다. 역사 뒤편에 묻힌 지역 인물을 재조명하자며 지역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힘을 결집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고수관 (高壽寬·생졸연대 미상)' 그는 조선조 말엽인 순조에서 철종 연간에 활약한 가인(歌人)으로 당시 송홍록, 모흥갑, 염계달 등과 함께 8대 명창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약관 20세 전후의 나이에 득음을 해 '고수관제'라는 고유의 창법을 개발해 전수하는 등 판소리계에 큰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이다.

판소리를 중흥한 것으로 유명한 신재효(1812-1884)와 호조와 병조참판을 지내고 시서화 모두에 능해 삼절로 불리던 신위(1769-1847)도 그의 노래를 좋아해 여러 번 초청해 극회(劇會)를 열어주고 격려했다고 전한다.

'판소리 명창 고수관 선생 기념비'라고 쓰인 기념비는 고향마을이 아닌 충남 공주 박동진 선생 판소리 전수관 안에 있다.

a 충남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 29-5번지 명창 고수관 생가터

충남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 29-5번지 명창 고수관 생가터 ⓒ 안서순

그는 말년에 공주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반드시 고수관 선생의 기념비를 세워드려야 한다'는 고 박동진 선생의 유지를 받아 지난해 건립된 것이다. 생전에 박 명창은 "내가 고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고수관은 소리로 일세를 풍미한 대가다. 그런 인물임에도 그는 지역사람들에게는 "고수관이 뭐하던 사람인데?"할 정도로 생소한 인물이기도 하다. 재인(才人)은 광대로 백정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그는 고향에서마저 철저하게 잊혔을 것이다.

서산향토연구회의 이은우씨(71)는 "그가 문과에 급제해 높은 벼슬살이를 하면서 시나 그림을 그려 이름을 날렸다면 지역에 사당이 서고 행적을 기리는 비가 몇 개는 서 있을 터인데 재인으로 살다 갔기 때문에 망각됐다"고 애석해 했다.


a 지난 해 공주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내에 세워진 고수관 기념비

지난 해 공주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내에 세워진 고수관 기념비 ⓒ 기념사업회 자료사진

실제로 고향에서 그의 흔적은 이미 오래전에 지워졌다. 남은 것은 나이 든 촌로들 사이에 전해진 이야기가 단편적인 전설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 전부다.

그는 충남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29-5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생몰연대(生歿年代)는 알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고씨라는 성씨만 알 수 있을 뿐 어느 파(派)누구의 몇 대손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다만 고수관과 같은 시대에 산 고향마을 사람의 말이 전해 내려와 몇 토막만이 전설처럼 남아 회자할 뿐이다. 그의 생가터는 오래전 밭으로 일궈져 집터가 있었다는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태어난 집이 잔디를 떠다가 벽을 만든 '떼장집'으로 불린 삼간 옹팡집이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미천한 신분의 자제로 출생했음이 분명하다.

6일 그의 출생과 죽음에 대해 김광조 고수관 기념사업 위원장은 "누구누구의 몇 대조 할아버지와 한해 태어나고 또 누구의 몇 대조가 죽은 해에 묘소가 만들어졌다는 마을 노인들의 말을 종합해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1764년(영조 40년)에 나서 1844년(헌종 10년) 80세의 나이에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a 고수관이 소리공부를 하며 마셨다는 생가 뒷산 골짜기의 꽃샘터.

고수관이 소리공부를 하며 마셨다는 생가 뒷산 골짜기의 꽃샘터. ⓒ 안서순

당시 그가 태어난 '초록리' 일대는 부호들이 많아 이들을 불러 '놀이'를 즐기는 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그는 숙명적인 가난과 마을에 북적거리는 재인 등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소리를 배우고 마침내 소리꾼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라는 게 지역 항토사학자들의 추론이다.

그의 소리 스승이 누구인지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소리의 기법을 볼 때 당시 명창인 염계달의 '창제'를 본받았다고 하나 실제로 사사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 시대의 사정이 그러하듯 그도 토호와 향족이 우글거리는 고향에서 견디다 못해 소리 하나 달랑 들고 타관으로 떠돈다.

그러나 목소리가 섬세한데다가 아름답고 딴 목청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어 '딴청일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의 탁월한 목으로 명성을 날렸다. 소리에서 일가를 이룬 것이다.

a 마을이장 이대근씨가 고수관의 무덤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마을이장 이대근씨가 고수관의 무덤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안서순

그의 생가터에서 오솔길을 따라 산기슭으로 500여m 올라가면 큰 소나무밭 아래 외래종 나무가 심어져 칡넝쿨과 어우러져 있는 심란한 자리가 있는데 여기가 봉분이 있던 자리다. 거기에서 100여m를 더 올라가면 그가 소리공부를 하면서 득음을 하기 위해 마셨다는 '꽃샘'터가 있다. 1972년 마을에서 간이상수도를 만들면서 이를 파묻어 지금은 겨우 흔적만 보인다.

'고수관 안내'를 위해 동행한 이 마을 이대근(61·초록리 1구 이장)씨는 "고수관 선생은 지역에서는 특이하게 판소리계에 우뚝한 큰 인물인데 비석은 고사하고 봉분조차 없으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 사는 김대석(81)옹이 추석명절 때마다 그의 묘소에 난 풀을 깎아 주었으나 1980년대 중반 땅 주인이 바뀌면서 묘의 봉분을 허물고 나무를 심는 바람에 지금은 마을에 나이 든 사람들만 그 근처에 묘가 있었다는 것을 가늠하고 있다.

백종신 고북면장은 "고수관 명창을 기리기 위해 올해 전기(傳記)을 발간하고 그의 행적과 '고수관제'에 대한 세미나, 소리꾼 등을 초청하는 공연 등을 계획하고 있다"며 기념사업회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줄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김광조 기념회위원장은 "기념회의 목표는 '고수관 기념관'을 세우는 일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부족한 자료를 구해놓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먼저 이달 중 고수관의 행적을 더듬기 위해 소리꾼들의 자취가 많은 전남 고흥지역을 방문키로 했다"고 말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2. 2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3. 3 늙음은 자전거 타는 친구가 줄어들고, 저녁 자리에도 술이 없다는 것 늙음은 자전거 타는 친구가 줄어들고, 저녁 자리에도 술이 없다는 것
  4. 4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5. 5 대법원에서 '라임 술접대 검사 무죄' 뒤집혔다  대법원에서 '라임 술접대 검사 무죄' 뒤집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