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작품에서 시간의 궤적을 찾다

일정 김주익 서예전, 3월 8일부터 경인미술관에서 열려

등록 2006.03.07 20:28수정 2006.03.08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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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주익 作, 不知禮無以立也, 130×70

김주익 作, 不知禮無以立也, 130×70 ⓒ 김주익

모든 작가들에게 있어 작품은 숙명과도 같다. 거역하지 않고 그 숙명이 이끄는 길에 발을 들여놓는 일. 그래서 작가들에게 있어서 작품을 하는 행위는 '득음' 과정이다. 득음(得音)은 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획득하는 데 있는 것. 어디 소리만이 그렇겠는가.

수원의 작가 연구실을 찾은 날은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었다. 맞바람을 맞으며 약도를 들고 더듬어 찾아가는 길. 일정(逸亭) 김주익(金周翼)씨의 작품에서는 맞바람을 맞을 때의 반발력이 느껴진다. 그래서 탄성(彈性)과 탄력을 획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다보면 번뜩이는 영감은 생이지지(生而知之)임이 분명하지만, 그가 펼쳐내는 작품의 속내는 학이지지(學而知之)와 곤이지지(困而知之) 중간의 어느 지점일 듯싶다. 그런데도 배우고 익히며 어렵게 획득한 그 지점 어디에서 낚아 올린 작품이 '타고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그의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중국 염황미술관(2. 25 ~ 3. 2) 초대전에 이어 한국 경인미술관(3. 8 ~ 3. 14)에서 연이어 개인전을 여는 작가를 만나보았다. 염황미술관(炎黃美術館)은 해외의 작가 중심으로 회화, 서예 등의 작가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개최하는데, 지난해 8월에 이번 전시회 초대를 받았다. 국내전도 중국전에 이어 열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준비된 것이다. 그러나 단순 연계성 때문에 국내전시를 계획한 것이 아님을 작가는 분명히 밝힌다.

“개인전을 연이어 여는 셈인데, 대규모 전시도 중요하지만 소규모 전시 형태로 매년마다 전시회를 선보일 계획으로 노력하려고 합니다. 결국 매년 전시 준비가 모두 공부이고, 공부가 결국 전시로 드러나니, 연습이 실전이고 실전이 연습이 되는 셈인데, 전시회는 결국 보다 높은 완성도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에서 확보해야 할 중요한 거점일 듯싶습니다.”

a 김주익 作, 鴈門峴, 136×70

김주익 作, 鴈門峴, 136×70 ⓒ 김주익

작가는 전시회를 자주 갖는 것에 대해 분명한 자기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전시회를 위하여 한문, 한글, 문인화 등 두루 거치면서 자신의 작품에서 특장을 읽어내는 것, 이는 자기 색깔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자기 색깔에는 자기의 품성과 사고와 필법의 원리가 종합되어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면서 자기 영역이 구축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 편을 가지고 나름대로, 또는 필법에 준한 작품을 더 치밀하게 해보려는 노력, 정통 서법에 근거해서 현대적인 조형을 어떻게 가져갈 수 있을 것인지, 가령 공감대를 형성하여 작가 자신만이 좋다고 하는 것을 넘어서 소비까지 이어지는 부분도 획득할 수 있는 작품을 창출하는 일, 이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공부하는 마음이 전시회를 준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공부하는 과정에는 금세 변화를 감지해내는 짧은 기간의 변화도 있을 수 있고, 모르는 사이에 변화를 일구어낸 긴 기간의 변화도 있을 것이다. 결국 그 하나하나는 변화이며, 그 변화의 연결선상은 결국 큰 변화일 것이다.


동일한 공간을 거쳐 간 시간과 현상의 축적이 역사라면, 그의 작품은 시(時)와 행(行)이 쌓여진 결과물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의 궤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먹빛궤도’라는 전시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행로는 먼 앞을 두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지나온 배후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돌아보면 어느 한 순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제가 추구할 수 있는, 그리고 추구하는 쪽이 있는데, 잘 안 만들어져요. 그래서 똑같은 글씨를 놓고 쓰는 대로 뒤돌아보면 저 작품은 보기에는 좋지만 내 마음 속에 정말 자리 잡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하는 생각을 아직까지도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간혹 한 전시회에서 흡족할 만한 작품이 몇 점씩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전체가 다 익어서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절차탁마해야 한다는 심정입니다. 그것이 또 다음을 기약하게 되고, 또 미진한 점을 풀어가려는 동기이지요.”

a 김주익 作, 新福, 50×78

김주익 作, 新福, 50×78 ⓒ 김주익

작품을 하다가 득의의 작품을 얻었을 경우, 이는 창작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 느낌이 이후 작품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도 하지만, 변화, 확산, 상승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이 계속해서 전시회를 갖게 되는 자극제 역할을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작가의 최근 작품 스타일에 대해 질문해 보았다.

“지금은 한문을 일상 문자로 쓰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문(文)을 잘하여 이를 그대로 옮겨놓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대는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매개로 한 작품을 하기 때문에 문자를 가지고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a 김주익 作, 閑適, 136×70

김주익 作, 閑適, 136×70 ⓒ 김주익

그렇다면 조형성에 대한 관심과 반영의 정도는 어떠할까?

“반드시 조형성만을 염두에 두고 작품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전시회의 경우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조화와 변화, 다양성 등 안배를 고려합니다.”

이번 전시회 쪽으로 말머리를 옮겨가 보았다. 전시 작품들을 미리 일람해보면, 다양한 작품 가운데 한문과 한글 작품을 동일 공간 내에서 함께 보여주는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이러한 창작 방법은 작가가 전부터 종종 선보여 왔던 경우인데, 한문을 두루 읽어내는 능력을 갖추기 힘든 현대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과 함께 한글 석문을 하나의 작품 안에 병립시키는 것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한문과 한글의 어울림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고요.”

작가는 또한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컬렉터들의 구입 의욕을 자극할 수 있는 루트도 찾아서 실행하고 있었다. 지난해 미술은행이 발족되면서 작가의 작품이 선택된 것, 안산에 준공되는 경기도미술관에서 전체 미술 장르를 대상으로 작품 공모를 하여 작가의 작품이 매입되기도 하였다. 서예계에서는 드문 일로, 현재는 앞선 누군가가 나서서 길을 개척해 주어야 하는 일이기도 한데, 이는 단순히 작품 컬렉션 차원에만 국한되는 게 아님을 분명하게 실천해 보여주는 것이다.

대화가 좀 더 거대담론 쪽으로 방향을 잡자, 서예의 서양미술과의 차별성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들어보기로 했다.

“서예는 모필을 가지고 문자의 원리를 풀어야 합니다. 문자를 매개로 기본 필획에 어긋나지 않는 작품을 하는 것, 이것이 서예를 어렵게 여기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서예가 갖는 독특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서예는 양면 거울을 닮았다. 그러나 그 양쪽은 동일한 모습을 비쳐주지는 않는다. 한쪽이 길고 어려운 '곤이지지(困而知之)'를 비쳐준다면, 다른 한쪽은 반짝이는 매혹과 팜므 파탈(femme fatale)과 같은 유혹을 보여준다.

a 서예가 일정 김주익 씨

서예가 일정 김주익 씨 ⓒ 이용진

“서예는 맑게도, 푹 젖게도 쓸 수 있고, 칼로 자르듯이 예리한 획을 그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획질인데, 획 질감을 가지고 어떠한 구상과 발상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작품 안에서 어떻게 하면 어울리고 자리를 잡게 될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가령 작품 '月小山高靜(월소산고정)'은 문자를 가지고 회화적으로 풀어냈지만 획의 질감은 잘 살아나 있다. 한편 '봄바람 꽃동산', '茅亭雨眺(모정우조)'처럼 협서를 상하에 배치하는 독특한 구성도 일찍이 작가가 선보여온 구성이다.

질감과 필법에 대해 얻었으면 무엇이 다르고, 무슨 컨셉트를 가지고 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공부가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일정 김주익씨는 그래서 전시회를 계획하고, 그 전시회를 위하여 또 '학지(學知)'로 나아간다. 설사 '곤지(困知)'에 더 가까울지라도. 작가는 내년에는 '채근담'을 소재로 한 작품전을 열 계획을 벌써 세워놓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서예가 일정 김주익씨는 원광대 동양학대학원에서 서예문화학을 전공하였고, 동아미술제 대상을 수상하였다. 대한민국미술대전, 경기도미술대전 등의 초대작가이며, 이번 개인전을 포함하여 7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현재 수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원 서예학과 외래교수이다.

* 이 글은 <월간 서예문인화>에도 송고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서예가 일정 김주익씨는 원광대 동양학대학원에서 서예문화학을 전공하였고, 동아미술제 대상을 수상하였다. 대한민국미술대전, 경기도미술대전 등의 초대작가이며, 이번 개인전을 포함하여 7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현재 수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원 서예학과 외래교수이다.

* 이 글은 <월간 서예문인화>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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