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아, 오만아 내 친구 오만아!

20년 넘게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내 친구 이야기

등록 2006.03.14 09:48수정 2006.03.14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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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남 강진에는 보리가 한창 자라고 있었습니다.

전남 강진에는 보리가 한창 자라고 있었습니다. ⓒ 김두헌

지난 3월 9일, 목요일이었나 봅니다. 서울에 사는 제 친구 오만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말입니다. 대뜸 전화해 "뭐, 하냐?"하고 묻길래 내심 당혹스러웠죠.


그도 그럴 것이 서로 떨어져 살아 그리 자주 연락도 하는 편이 아니었고 그쪽에서 잊혀질만한 하면 가끔씩 전화를 해와 '고흥이다', '부산이다', '전주다' 하면서 자신의 근황을 전해주곤 했으니 말이죠.

근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저도 갑작스런 녀석의 질문에 엉겹결에 "이번에는 원양어선이라도 탔냐"하고 심상하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녀석 왈 "응, 여기는 서울이고 여관방이다" 하는 겁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제가 말 실수를 했다는 걸 직감으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봄날, 여관방에 엎드려 뭐하는데?"

이런, 이런 엎친데 겹친격으로 방금 전 말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또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저쪽에서 아무 말도 없기에 기왕에 한 실수 모르쇠하며 밀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어디 직장은 안 다니고?"

연이어 실언에 실언을 거듭했습니다. 남도의 차창 밖에는 봄이 한창이었습니다. 보리며 마늘이 보드라운 황토흙을 뚫고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엉, 어디 들어가 보려고 애를 써도 잘 안 되네?"

휴대폰으로 전해져 오는 녀석의 목소리에 힘이 쭈욱 빠져 있더군요.

내 친구 오만이가 누구냐고요?

녀석은 바닷가 섬마을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할머니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오만이를 극진히 챙기고 아끼시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래,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채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열너댓살의 꼬마 소년, 서울로 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햇볕도 안 드는 지하 봉제공장에서 갖은 먼지를 마시며 20년이 넘게 살았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 전셋집도 마련했고 누나, 동생들과 함께 살던 단란했던 때도 없진 않았죠.

누나, 동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혼자 남아 살기를 10여년! 결혼까지 꿈꾸던 녀석에게 IMF라는 흉칙한 괴물이 나타났고 그 괴물은 녀석에게서 직장과 집, 그리고 아내가 될 사람도 빼앗아 가고 맙니다.

이후 녀석의 10여년간의 방랑은 시작됐습니다. 원양어선도 타 보고 고흥에서 전어도 잡아보고 전주에서 공사판에서 막일을 해보기도 하고 부산에서 잡일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언제고 돌아가면 의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재단사 일도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거대한 양극화의 파고를 피할 순 없었습니다.

a 전남 무안 현경의 비닐 하우스.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전남 무안 현경의 비닐 하우스.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 김두헌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녀석에게 돌아갈 직업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골프파동과 성추문으로 온나라가 들썩이는 대한민국이 녀석에서 제공할 수 있는 혜택이라곤 여관방, 한구석만큼의 공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오만아, 힘을 내야지. 제일 밑바닥까지 내려가본 니가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냐?"

아, 대졸인 저는 그날 여관방에 엎드려 있는 오만이를 위로해준답시고 10여분간의 통화내내 녀석의 비위만 슬슬 긁어대고 있었던 것이죠. 이게 바로 '먹물 근성'은 아니었을까요?

이 세상에 태어나 엄마 아빠 잘못 만나, 나쁜 일 한번 못 해보고(?) 열심히 산 죄로 여관방에 갇혀 스스로를 자학하고 대한민국을 원망하고 있을 믿음직한 재단사 김오만군을 채용해 줄 훌륭한 사장님, 어디 안 계십니까?

서울 어느 여관방 구석에 처박혀 있을 녀석을 햇볕으로 나오게 할 책임이 그나마 조금 배웠다는 우리 먹물들에게 있는 게 아닐까요? 오만이를 만나고 싶으신 분 제게 메일 주십시오.

이 아름다운 봄날, 제 친구 오만이에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 뭔가를 파종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해찬 총리의 사퇴문제에만 관심 갖지 말고 말이죠. 관심 있는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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