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89회

등록 2006.03.16 08:43수정 2006.03.1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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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은 인시(寅時) 초에 이루어졌다.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는 시각이었고, 경비를 서는 사람들도 가장 피곤하여 긴장감이 떨어지는 시각이었다.

화르르륵---! 파아악----!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군웅들이 깬 것은 화마와 질식할 것 같은 연기 때문이었다. 지형이 낮은 관계로 기름을 먹인 천을 화살촉 앞에 뭉쳐 두르고 불을 붙인 화살이 허공을 난무하자 천막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삐이익---- 삐---익

적의 침입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있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제마척사맹의 군웅들이 머물고 있던 곳은 대낮보다 더 환했다. 군웅들이 물통을 들고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만약을 위해 물을 준비해 두었지만 우박처럼 쏟아지는 불붙은 화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으아악----!"

우측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삼진(三陣)이 있는 곳이다. 칠결방의 방주 진대관(陳大棺)과 동정채(洞庭寨)의 채주인 철부왕(鐵斧王) 나정강(羅晸康)이 맡고 있는 곳. 가장 전력이 떨어지는 곳이다. 더구나 진대관이 흉수로 밝혀지고 칠결방의 수하 대부분이 연루된 터라 전력의 삼 분의 일 정도가 약화되어 있는 터였다.


"괴물… 실혼인들이다…!"

누군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옷차림조차 제대로 여미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실혼인들이 들이닥치자 우측을 맞고 있던 삼군은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팔다리가 잘려도 피가 나지 않는 실혼인은 공포였다.


나정강과 그 주위의 고수들만이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동정채의 정예들이었기에 그런대로 빠르게 대응하고 있었다. 나정강의 철부가 호선을 그리며 날았다.

위잉-----! 퍼퍼퍽----!

철부가 공기를 가르며 실혼인의 머리를 박살냈다. 허연 뇌수가 파편처럼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살아있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 할 수도 없는 실혼인이라 해도 머리가 부서지자 움직임을 멈추고 뒤로 넘어갔다.

그 모습을 본 군웅들의 사기가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다. 죽음을 모르고 달려드는 괴물들이지만 그들도 죽지 않는 존재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군웅들은 미친 듯 날뛰는 실혼인들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실혼인들은 한결같이 고수였다. 그보다 더 두렵게 만드는 것은 수비를 도외시한 채 오직 공격만 한다는 점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실혼인들을 벨 수는 있어도 자신도 역시 다칠 것이란 생각에 과감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십여 명의 실혼인들로 인하여 삼군 전체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이유였다.

"크아악---!"
"시검사도다!"

비명은 이진(二陣)쪽에서도 터져 나왔다. 구파일방이 주축이 되어 청허자가 이끄는 곳. 화마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 열댓 명의 시검사도 괴물들이 군웅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실혼인들과 달랐다. 피부는 온통 흑녹색을 띠고 있었는데 무공의 수위는 한 문파의 수뇌급 정도에 달하는 것 같았다.

청허자와 이진의 고수들이 군웅들을 독려하고 있었지만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군웅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가장 막강한 전력을 가진 중군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대항하고 있는 편이었다. 철혈보와 세가들의 전력으로 이루어진 중군은 선봉에 선 철혈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예봉을 막고 있었다.

사실 철혈대는 시검사도나 실혼인들에게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철혈대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가 바로 시검사도를 상대하기 위함이었으니 당연했다. 상대가 실혼인이나 시검사도로 중군을 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상대가 제마척사맹의 전력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둘러 임시로 세운 망루에 오른 만박거사 구효기는 절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벌써 막대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희생을 줄이려면 중군에 있는 철혈대를 좌군인 삼진으로 보내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인원은 삼군 모두 비슷했지만 중군에는 고수들이 많았다.

철혈보의 고수들뿐 아니라 황보가주와 모용가주, 그리고 구양휘까지 있는 상황이어서 철혈대가 없더라도 무난히 버티어낼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는 오색의 깃발이 꽂혀 있는 통 속에서 청색과 녹색의 깃발을 꺼내들었다. 수기(手旗)를 함이었지만 그는 결국 수신호를 보내지 못했다.

"으악----!"

배후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몸을 돌린 구효기의 눈으로 절벽을 타고 내리는 적들이 보이고 있었다. 진퇴양난이었다.

--------------

인간의 실수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인간으로서, 인간이기 때문에 하는 실수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실수가 그것이다. 전자의 실수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주고 용서를 해주곤 한다. 하지만 후자의 실수는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한 실수는 그저 업보(業報)처럼 평생을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담천의의 실수가 그러했다.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무도 이해해 줄 수 없는 일이었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있어서나,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그랬고, 정작 실수를 저지른 남궁산산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된 것은 자신의 몸에 옷을 입히는 손길 때문이었다. 남궁산산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에 옷을 입히고 있었다. 아마 상처난 부위에 금창약을 바르고 옷을 입히고 있을 것이다. 이미 피에 절고 찢겨져 나가 너덜너덜해져 있었지만 사내의 옷은 그것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

담천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아무리 이성이 마비되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나 그는 마치 꿈을 꾼 듯이 희미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분명 아니었다.

남궁산산을 쳐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독기의 발작 때문이었는지 전신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자신의 하초는 부풀어 있었다. 아마 자신의 몸속에 아직까지 춘약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옷을 입히고 있었으니 그녀는 분명 보았을 것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려 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이미 옷매무새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

옷을 입히는 그녀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담천의가 깨어났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허나 그녀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때 보면 확실히 사내보다 여인이 더 담대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꼼꼼하게 옷을 챙겨 입히고는 처음으로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니 웃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크고 여린 눈망울이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요상을 위해 노력했을 뿐이에요. 오라버니가 아파서 도와주었을 뿐이에요. 저는… 오라버니를 탓하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찌 그 말뜻을 그가 이해하지 못하랴! 허나 그는 대꾸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내 여자라 말할 수도 없으니 달리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단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육신의 섞임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너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

그가 힘겹게 바싹 멀라 부르터진 입술을 열자 그녀의 섬섬옥수가 그 입을 막았다. 무슨 말을 들은 들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한들 속이 시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더 이상 이어지지 않게 만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방으로 들어오는 우교와 두 사내였다. 두 남녀가 옷을 입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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